여성의식 소중히 키워 그 씨앗 뿌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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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운동가라는 이미지보다는 ‘광주 5·18’, ‘민가협’등으로 더 먼저 알려진 이명자씨(50세, 광주여성단체연합 대표). 그의 이런 경력은 그를 이 지역 여성운동의 버팀목으로 세우기에 충분했다. 80년 5·18은 그의 남편(정동년, 현 광주남구청장)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그리고 두 아이와 가정밖에 몰랐던 평범한 주부 이명자씨를 거리로 내 몰았다. “4월에 둘째를 출산해 몸조리도 채 못한 상황이었죠. 그 힘들던 상황에서 서투르게 대처한 것들이 지나고 보니 내 여성운동의 뿌리이며 시작이었다고 생각해요 ”

강한 여성으로 일으켜 세운 민가협

“남편이 수감되면서 늘 경찰이 집 주변에 상주했어요. 서울 등지에서 큰 집회가 있을 땐 감금도 시켰어요”. 이씨는 그런 중에도 ‘구속자 가족회’를 결성하고 미문화원을 점거하기도 했다. “저 정말 사나웠어요. 재판장을 엎어버리기도 하고 전두환 전 대통령이 광주 방문을 했을 때는 회원들하고 대통령이 탄 차를 도청으로 밀고 가기도 했어요”라며 남편이나 자식이 구속된 상황에선 달리 방법이 없지 않았겠느냐고 되묻는다.

“84년에 처음 결집된 ‘구속자 가족회’가 ‘민주화 실천 가족협의회’로, 다시 ‘5·18부상자협의회’로 시대적 상황에 맞춰 명칭이 바뀌면서 5.18은 그 상채기를 안은 채 20여년의 세월동안 그 정체성을 찾아 왔어요. 그 과정엔 틀림없이 우리 여성들 특히 어머니들의 큰 힘이 녹아 있어요. 그 당시 정치투쟁 형식의 민주화운동 속에서 여성문제를 독자적 영역으로 인식하며 어머니들, 나아가 여성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여성운동의 시작이 아니었겠냐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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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가협 어머니들은 매년 망월동 묘역에 카네이션을 꽂는다. 한복 입은 왼쪽이 이명자 대표.

민가협 회원들이 왕성히 활동할 때 그들은 참으로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가까이 하여 손해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그들 곁을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 어떤 어려움보다 힘들었던 것이 바로 그런 외로움과 서러움이었던 듯 이씨의 눈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진다.

그러나 그런 아픔과 고뇌들이 그의 삶을 뒤돌아보며 사는 삶, 사회에 봉사하며 사는 삶으로 획을 그어주었다고 이씨는 말한다.

그는 광주 5·18문제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 여성운동의 한 모델로 ‘5·18과 여성’을 접목 시켰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은 자연스럽게 함께 굴러 갈 수 있었으며 이후 이 지역의 여러 사안들이 터질 때 함께 대처할 수 있었다. 이즈음‘여성문제특별위원회’는 진보여성단체들을 통합하는 여성단체로 창립되었다. 이 위원회엔 ‘광주여성의 전화’,‘광주여성회’,‘광주여성노동자회’,‘여성농민회’,‘여대생협의회’등 6개 단체가 연계해 열악한 재정적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 지역의 여성문제를 함께 짚어 나갔다.

여성의 인권·성차별 해결위해 뛰겠다

광주여성단체연합은 2000년 5월, 5·18 20주년을 맞아 5·18과 여성을 재조명하는 <여성,삶,주체>라는 책을 발간해 이 지역 여성운동과 5·18을 접목시켰다.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자리에서 이제는 가정과 남편, 자식만을 위한 여성이 아닌 여성의 삶과 인권과 평등 그리고 성차별 등 모든 여성사안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뛰고 있다. 민주화운동으로 일깨운 여성의식을 소중히 키워가며 그 씨앗들을 사회에 뿌려 환원하겠다는 일념이다. 역사의 타자가 아니라 주체였음을 분명히 규정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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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표가 돌보는 ‘통일의 집’ 비전향 장기수 어르신들과 함께.

이명자씨는 95년도 지자체 선거에서 전남도의원(비례)으로 당선되었다. 행정적인 사항은 물론 여성주의 인식조차 미비한 상황이어서 처음엔 힘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랬기 때문에 더욱 깊이 성찰하며 의욕을 갖고 임할 수 있었고 그러면서 동료의원들의 도움을 얻게 돼 잘 해낼 수 있었다고. 첫 여성의원으로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마음에 무엇이든 늘 심사숙고해 연구하고 추진하곤 했다.

그가 도의회 문교사회위원이 돼서 처음 장애인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그 열악한 시설에 깜짝 놀랐다. 그 뒤 그는 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인쇄, 인장업을 권장하여 그 사업장을 마련해 주는 데 애를 쓰기도 했다. 또 5·18특위 위원장일 때는 전남도청 정문에 ‘5·18민중항쟁 알림탑’을 세우기도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성의원으로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한 그는 여성의 대표이자 대변자로서 갖추어야 할 여성의식과 여성문제에 늘 관심을 가졌다. 동시에 그 안에 관습처럼 내재된 잘못된 인식들을 들추며 성찰하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기간이어서 많은 문제들을 풀어내기엔 역부족이었고 지금도 그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열매 맺기위해 봉사하는 삶

그는 지역여성운동에 대해 늘 토론하며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고 추진하고자 노력한다. 아울러 시대에 맞는 여성운동의 확장에 대해서도 회원단체들과 고민한다. 또한 최근엔 사이버커뮤니티의 형성으로 지역에서 세계의 여성운동가와 만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고 있다. 그는 그 동안 사이버공간이 여성운동에 관한 정보를 알리는 일차적 홍보공간의 수준을 넘지 못한 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제는 단순 정보 제공을 넘어 쌍방의 토론과 대화의 형성을 통한 사이버 페미니즘으로 나가야 될 것이라는 큰 틀을 제시한다.

외롭고 서러웠던 민주화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여성을 대표하는 도의원으로 꾸준히 여성의식을 바르게 살찌워온 이명자씨는 이제 다듬어져 가는 여성운동가로 삶의 한 가운데 서 있다. 그런 그의 삶에서 주위 사람들은 그들 부부가 사는 모습에 주목했다. 이씨 부부가 이뤄온 평등한 가족문화가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2000년 7월, 이들 부부는 광주YWCA가 주는 평등부부상을 수상했다. 그 상엔 그간 고된 삶 속에서 그들 부부가 함께 한 고뇌와 눈물이 함께 녹아 있음은 믈론이다.

이명자씨는 금년 1월 광주YWCA 제72차 총회에서 이사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당선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제 제 삶의 구도를 확실히 잡은 것 같아요. 그 동안 짜임새 없는 삶의 구도 속에서 채색하며 그렸던 서투른 삶의 무늬들을 잘 살려내 짜임새 있는 구도로 채색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동안 쌓은 여성운동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이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지향하며 여성운동체인 YWCA운동에 동참하며, 내 삶 속에서 아직 영글지 않은 여성운동의 열매들을 아름다운 열매로 익히기 위해 봉사와 헌신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광주지사 강정임 지사장

이명자 대표 약력 1950년 광주 출생. 86∼94년 광주전남민가협회장 역임. 93∼95년 광주전남여성문제특별위원회 위원장 역임. 95∼97년 전남도의회 의원 활동. 96∼97년 도의회 5·18특별위원회 위원장 역임. 현재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대표. 광주대 무역학과 4학년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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