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문헌 없음’ 사태에 대한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은

절멸의 역사에 저항하는 움직임

가끔 검색해보는 이름들, 이자혜와 ‘바람 계곡의 페미니즘’. 새로운 소식은 없고 떠도는 악담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이들 이름이 신문, 잡지마다 실리던 게 일 년 전쯤이고 서로 다른 이유로 거의 모든 공론장에서 사라졌다. ‘바람 계곡의 페미니즘’은 페이스북을 떠나 독자적인 사이트에 잠시 머물렀지만, 업데이트가 멈춘 지 벌써 몇 달째다.

‘바람 계곡의 페미니즘’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매체나 독자들이 ‘바람 계곡의 페미니즘’이 사라지는 과정에 보인 무관심은 나에게는 계속 의문으로 남아있다. 비록 그들 스스로 사라지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은 결코 자발적이라고 하기 어려운 폭로전과 공격에서 비롯된 문제인데 이에 대해 기이할 정도의 침묵만이 맴돌았다.

이런 사태는 단지 ‘바람 계곡의 페미니즘’이라는 특정 온라인 페미니즘 네트워크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페미니즘이 부상하고 일시적으로 힘을 갖다가 다시 억압된 역사가 반복된 데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는 한국에서 긴 검열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으나 학문 제도 내에 안착하고 지적 계보를 구성해왔다. 국가 통제에 대한 저항이라는 현실과 아우라, 민주화 이후 학문 장에서의 헤게모니의 구축, 해외 유학파와 국내파의 갈등과 긴장을 통한 이론 논쟁의 가속화, 연구(대학), 저술, 학술 논쟁과 출판의 긴밀한 연계 등이 이런 지적 계보를 만드는 토대가 됐다.

학문으로서 마르크스주의는 젠더 중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마르크스주의가 남성 젠더화돼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진보적 학술운동이 오랜 세월 마르크스주의는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여성운동은 부문 운동으로 한정해온 것은 전형적이다. 이 문제는 이후에 더 자세한 논의를 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은 학문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지속적인 재생산에 난항을 겪어 왔다. 진보적 학술운동 진영에서 부문 운동이 되지 않고 독립적인 장을 만드는 것은 규모와 지속성에 타격을 받기 일쑤였다. 물론 일부 대학 학과나 그룹을 중심으로 한 제도적 재생산은 있었지만, 그것이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재생산을 대표해온 것도 페미니즘의 재생산을 협소한 부분에 제한하게 됐다. 페미니즘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분출하는 시점에서 페미니즘 이론을 감당할 연구자, 활동가가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이제야 다시 100년 전의 페미니즘 고전이 번역되고 이론의 계보도 역사도 없이 ‘페미니즘’으로 광범위하게 일반화된 논의가 이어진다.

대학에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페미니즘 교육은 진행되지 않았고, 될 수도 없었다. 대학과 지식 제도 안으로 포함된 페미니즘도 있고,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은 페미니즘도 있다. 한국 페미니즘 역사를 살펴보면 봉기와 절멸의 반복 속에서, 체제내로 동화되어 살아남은 자들이 페미니즘의 계보를 만들고, 살아남지 못한 이들은 망각의 심연으로 사라지는 과정이 반복된다. 나 또한 살아남은 자로서, 사라진 자들, 살아남지 못한 자들에 대해 기억의 책무를 매번 곱씹는다. 기억하는 일이 그저 한갓 된 살아남은 자의 윤리적 부채감과 자기합리화에 불과할 수 있다. 매번 그 한계도 곱씹는다.

탈냉전과 함께 부상했던 페미니즘의 봉기는 IMF 사태와 보수화의 흐름 속에서 다시 절멸의 길을 걸었다. 20년도 지나지 않았으나 페미니즘의 역사는 손쉽게 사라졌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은 채 ‘페미니즘 원년’은 다시 시작됐다. 급속한 봉기와 사회적 관심, 신세대 페미니즘의 부상과 몇몇 그룹과 논자들이 ‘스타’처럼 부상했지만, 또 급속하게 버려졌다. 이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팬덤식 소비의 문제도 있겠으나, 미디어나 학문 제도가 페미니즘을 소비하고 처리해온 역사의 반복이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스트들은 작은 논란에도 추문에 휩싸이고, 매도되고 공격당하고 살해당했다. 추문과 논란은 페미니즘 살해를 정당화해왔다. 페미니즘은 그렇게 매번 ‘원년’이 되는 반복을 살고 있다.

문단 내 성폭력을 공론화하고 이를 지원하는 ‘참고문헌 없음’ 프로젝트에 대한 논란과 좌초 위기의 과정에서도 이런 반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태는 그간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좌초 위기와 논란 속에서 ‘참고문헌 없음’ 사태에 대한 지지 철회 과정을 기록하고 조사하는 아카이브 작업이 트위터를 중심으로 진행 중이다. 이 작업은 페미라이터와 같은 기존의 문단 내 ‘페미니스트를 표방한 그룹’과 갈등 중이기는 하지만, 이 갈등 역시 그저 추문과는 다른 국면으로 진행 중이다.

페미니즘 일반이 아닌 서로 다른 사상과 기반을 지닌 페미니즘이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주로 세대적인 차별화에 근거했던 페미니즘 논의가 사상과 권력 기반의 차이를 중심으로 이질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갈등적인 논쟁과 분화 과정은 페미니즘을 막연한 ‘우리’가 아닌 이질적 힘들의 결사체로 구체화해나갈 것이라 보인다. 또 ‘참고문헌 없음’ 사태 때 프로젝트에서 하차한 봄알람을 ‘추문’과 ‘오명’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집단 움직임이 아카이빙 그룹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절멸을 반복해온 페미니즘 역사로 인해 최근 도래했다는 페미니즘 전성시대에도 소수의 페미니즘 연구자와 논자들로 담론장은 구성됐다. 담론을 감당하는 소수 논자나 온라인 네트워크는 ‘열일을 해야 하는’ 과도한 무게를 감당해야 했고, 관심의 무게만큼 비난의 무게도 과도했다. 몇 년간 온라인 페미니즘 네트워크는 이런 반복 속에서 계속 무기력하게 사라져버렸다.

‘참고문헌 없음’ 사태에 대해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이 보여주는 새로운 대응은 그런 점에서 단지 이 사안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페미니즘의 절멸의 역사에 저항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물론 이 새로운 가능성이 어떤 지속을 만들지, 혹은 굴절된 채 중단될지는 아직은 미정이다. 그러나 그 미지의 역사를 같이 만들고 써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곳의 페미니즘의 과제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