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피겨스’  중 IBM 전산 연구실의 상근 관리자가 된 도로시 본이 팀원들을 이끌고 복도를 행진하는 장면. ⓒ영화 <히든 피겨스> 스틸컷
영화 ‘히든 피겨스’ 중 IBM 전산 연구실의 상근 관리자가 된 도로시 본이 팀원들을 이끌고 복도를 행진하는 장면. ⓒ영화 <히든 피겨스> 스틸컷

 

“진짜, 여자의 적은 여자야.” 술자리에서 남자 지인들이 직장 여자 동료들 흉을 봤다. “자기들끼리 잘 놀다가도 돌아서면 ‘A는 영 센스가 없다’, ‘B는 아부를 잘해서 승진했다’고 헐뜯어.” “우리 회사 여직원들도 평소엔 사이좋은 척하다가 일만 생기면 서로 책임을 떠넘겨. 여자들이 알고 보면 피도 눈물도 없더라.”

이상한 일이다. 남자들도 직장 내 승진을 위해서, 기득권 다툼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 매사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남자의 적은 남자’이란 표현은 없다. 남자가 참여하면 애수 어린 생존 경쟁이고, 여자가 얽히면 볼썽사나운 싸움이다. ‘이기적이고 비합리적’인 여성들 간의 우정과 연대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그 바탕에 있다. 역사 속에서 남성이 여성을 길들여온 방식이자, 많은 여성들이 체화한 자기혐오다. 

그들이 영화 ‘히든 피겨스’를 보고도 당당히 ‘여적여’를 논할 수 있었을까? 요즘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이 영화는 1960년대 미국 나사(NASA) 최초의 우주 궤도 비행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끈 흑인 여성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여성들의 연대에 관한 훌륭한 증언이기도 하다. 

주인공인 도로시 본(옥타비아 스펜서 역)은 흑인 여성 수학자들이 모인 NASA 웨스트 에이리어 연구동의 대모와 같은 존재다. 또 다른 주인공이자 천재 수학자인 캐서린 존슨(타라지 P. 헨슨 역)이 우주임무센터에서 일할 수 있도록 추천한 사람도, 자신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는 백인들 사이에서 주눅 든 캐서린에게 “넌 수학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네 두뇌 회전 속도만큼 빠르게 연필을 굴려봐!”라고 격려하는 사람도 그다. 매일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수학자들도 통솔한다. 하지만 도로시 본은 관리직이 될 수 없다. ‘흑인 여성’이니까.

돌파구는 위기 속에 있었다. 인간의 손으로만 복잡한 계산을 처리하던 NASA에 IBM 컴퓨터가 들어온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할 날이 다가왔다. 변화를 피할 수 없다면?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보자! 이를 꿰뚫어본 도로시 본은 프로그래밍을 독학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여성 수학자들도 프로그래밍을 배우도록 장려한다. 이들은 NASA에서 유일하게 IBM을 활용해 궤도 계산을 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 된다. 도로시 본은 IBM 전산 연구실의 상근 관리자로 승진한다.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다. 그가 여성 팀원 30명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복도를 행진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환호했다. 주류 역사엔 기록되지 않았지만, 여성이 다른 여성을 도와 이룬 놀라운 성취의 한 순간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어떻게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깊이 생각해 보는 데 있지요. 영화도 그래요. 저는 이 영화를 본 소녀들이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옥타비아 스펜서가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한 사람의 진보는 우리 모두의 진보다(every step forward for one is a step forward for all).”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모색하기보다, ‘여적여’ 운운하며 깔아뭉개기에 바쁜 남성들이 귀기울여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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