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돌봄’을 중요한 책임이자

권리로 두지 않았기 때문

 

돌봄 망각하면서 잃어버린

삶의 중심 복원할 때다

 

3월 16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제17회 서울 베이비 키즈 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육아 용품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3월 16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제17회 서울 베이비 키즈 페어를 찾은 관람객들이 육아 용품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서점에 들러 신간 목록을 찾아보다가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나요?』라는 상당히 통통 튀는 제목의 책을 발견했다. 이 책은 현대 주류 경제학의 시초를 일궈낸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중대한 한계를 지적한다. 애덤 스미스는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이유는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라고 했다.

애덤 스미스씨, 저녁 누가 차려줬죠?

인간이 자신이 원하는 이익을 쫒기 위해 합리적으로 행동하다 보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되면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맞아떨어지고 사회가 유지된다는 것이 애덤 스미스 국부론의 핵심이다. 이때 애덤 스미스가 결정적으로 놓친 것은 바로, 그가 저녁을 먹을 수 있도록 했던 어머니의 ‘돌봄의 손’이다.

애덤 스미스는 그를 먹이기 위해 시장을 가고, 야채를 다듬고, 빵을 굽고, 스테이크를 구웠던 어머니의 노력과 시간을 자본주의 경제학 이론에서 완전하게 빠트렸다. 이후 주류 경제학자 누구도 돌봄이 경제 성장은 물론 사회 유지를 위해 없어선 안 될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경제학을 포함한 모든 사회 정책은 소위 공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노동과 재화에 관한 것으로 한정됐다.

사회 유지의 한 축이자 동력인 ‘돌봄’은 사회가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정치적 의제에서 배제됐다.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는 않으나 강력한 실체로 위력을 발휘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한 중심을 차지한 반면, ‘보이지 않는 돌봄’은 늘 존재하면서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실체를 부정당하는 망각 속에 갇혀버렸다.

그런데 점점 더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시장의 위력이 강력해지는 지금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돌봄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시장경제에 최적화된 시장형 인간만을 일등 시민으로 취급하는 사회 속에서 출산과 양육은 사적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한 개인에게 합리성에 위배된 행동이다. 나이듦은 위험이 커짐을, 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가중된 위험에 빠짐을 의미한다. 인간으로서의 실존보다 상품으로서의 최적화 정도만 측정되고 판단되는 시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외되고, 배제되고, 차별받는다. 무엇보다도 사람을 길러내고, 보살피는 일을 하는 사람(‘돌봄자’)은 그로 인해 본인도 위험을 맞닥뜨려야 한다.

돌봄은 중요한 정치적 의제

성별로 불평등하게 지워진 돌봄의 책임은 여성에게 위험을 넘어 위협 요인이 됐다. 이와 같은 시장지향사회 속에서 결혼이나 출산은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판단에 기초한 선택일 뿐이다. 따라서 저출산은 시장중심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여러 가지 정책들이 나오고 있지만 저출산 기류가 반등되지 않는 이유는 시장 논리를 넘어 ‘돌봄’을 사회의 중요한 책임이자 권리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돌봄이 필요한 아동, 노인을 돌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배제되고 차별받는 사회, 돌봄자를 돌보지 않는 사회부정의로 인해 사회재생산이 이뤄지지 않는 사회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깊이 있게 논의해야 할 의제는 시장과 이윤의 확대가 아니라 돌봄을 망각하면서 잃어버린 삶의 중심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의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돌봄 수행과 관련된 의제를 정치적 논의의 장에 올려야 한다.

누가 돌볼 것인가, 어떻게 자유롭게 돌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인가, 돌봄 책임은 어떻게 평등하게 나눌 것인가, 돌봄에 대한 대가는 어떻게 공정하게 할 것인가와 같은 문제는 돌봄 논의에서 앞으로 중요하게 다뤄야 할 의제이다. 민주주의는 정치민주화, 경제민주화뿐 아니라 돌봄민주화가 동시에 이뤄졌을 때 완성될 수 있다. 돌봄의 민주화를 통해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돌봄을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이자 책임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던 부자유, 불평등, 부정의를 줄일 수 있다.

한편으로는 돌봄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혹은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사회적으로 배제되거나 차별받았던 여성, 아동, 노인, 장애인을 사회구성원으로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돌봄 책임에서 무임승차한 남성들과 국가가 그 역할과 의무를 분담하고, 돌봄자에 대해서는 공정한 대가를 지불하게 해서 평등과 정의를 복원할 수 있다. 남성을 포함한 사회구성원이 공정하게 돌봄의 책임과 권리를 나눠 갖고, 국가는 사회 전반에 걸친 돌봄을 재평가, 재분배, 재조직하면서 적극 돌볼 권리, 돌보지 않을 권리, 돌봄을 충분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때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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