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페미니스트 작가·여성학자 박혜란

 ‘여성학자’·‘가수 이적 엄마’·‘육아 도사’

“노년층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해야”

나이듦에 대한 단상 『나는 맘먹었다 나답게 늙기로』 출간 

 

27일 만난 여성학자 박혜란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7일 만난 여성학자 박혜란은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상위시대’에 웬 페미니즘이냐며 빈정거리는 남자들이 요즘도 많아요. ‘여자보다 못나 보이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한다’며 자신을 방어하고, 제 본성과는 다른 과장된 역할을 떠맡으려는 남자들의 모습이 참 불쌍하지 않아요? 여성이 억압받는 사회에선 남성도 억압받지요. 모든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확신해요.”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히 선언하고,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꿈꾸는 여성을 만났다. 30여 년째 방송과 강단을 넘나들며 여성의 삶과 결혼, 육아에 관해 이야기하는 여성. 일상사를 다룬 경쾌한 에세이 속 가부장제에 관한 촌철살인을 빼놓지 않는 작가. 올해 일흔을 맞은 여성학자 박혜란이다. 

 

여성학자 박혜란이 이달 중순 펴낸 에세이 『나는 맘먹었다 나답게 늙기로』. 절판된 책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2010)에 서문을 추가해 새롭게 펴낸 책이다.
여성학자 박혜란이 이달 중순 펴낸 에세이 『나는 맘먹었다 나답게 늙기로』. 절판된 책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2010)에 서문을 추가해 새롭게 펴낸 책이다.

요즘 그는 나이듦에 대한 단상을 책으로 엮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오늘, 난생처음 살아보는 날』과 『나는 맘먹었다 나답게 늙기로』를 발표했다. 후자는 절판된 책 『다시, 나이듦에 대하여』(2010)에 서문을 추가해 최근 새롭게 펴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성이 노란 치마, 땡땡이·꽃무늬 웃옷을 입고 신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그린 표지가 경쾌하다. ‘페미니스트 박혜란의 조금은 특별한 일기’라는 카피도 눈에 띈다. 

“‘페미니스트’라는 수식어를 부정할 이유가 없어요.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은 요즘도 존재하죠. ‘여성의 권리만 박박 우겨대는 사람’, ‘남성을 적대시하며 매사에 전투적인 사람’? 무식한 소리예요. 페미니스트는 ‘열린 사람’이에요. 국적·성별·인종 등을 떠나서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페미니즘이죠. 물론 사람들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지요. 그래도 끌어안고, 이해시켜야 해요. 나부터 페미니즘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서, 보여줘야 해요.”

세상은 그를 ‘여성학자’ ‘이적 엄마’ ‘세 아들을 명문대에 보낸 육아 도사’로 부른다. “내가 아니라, 모두 매스컴과 대중이 붙여준 이름이죠. 여성학을 공부하고 대중 강연을 한다고 ‘여성학자’로 부르다가, 1996년부터 아들 이적이 인기를 끄니까 ‘이적 엄마’라고들 부르더라고요. 대중문화의 영향이 여성학을 앞지른 거죠. 언제까지 나를 그렇게 부를지 궁금해요. 내 이름 앞에서 ‘누구누구 엄마’가 사라질 때, 한국 여성들은 더욱 주체적으로 살 수 있게 되겠지요.”

 

노년을 재앙으로 여기는 시대, 노인을 사회의 군더더기로 여기는 시대에 대한 통찰도 들려줬다. “다들 늙어가는데도, 다들 늙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요. 늙음은 약하고 악하고 추한 것이라고들 생각하죠. 그런데 그건 내 존재를, 미래를 부정하는 일이거든요.” 

‘박근혜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태극기 집회’ 참가 노인들의 울분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했다. “지금 노인 세대는 민주주의 훈련을 받지 못한 세대예요. 이 ‘산업화 역군’들의 삶을 통과하는 키워드는 오로지 ‘생존’이었어요. 시민성, 민주주의 가치 등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기회가 없었지요.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선 이들의 욕구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드물어요. 산업화 이전에야 노인의 경험과 지혜가 중요한 자원으로 인정받았지만 요즘은 ‘네이버’가 다 알려주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은 잉여인간 취급받을 수밖에 없고요. 이제 박정희와 박근혜가 부정당하자 자기 존재까지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저항하는 거지요. ‘민주정부를 이루지 못한 우리는 독재 정권의 부역자냐, 우리는 사회에 해만 되는 무가치한 존재냐’, 이런 울분이 있는 거죠. 이대로는 세대 갈등이 심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는 “지금의 세대 갈등은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고 봤다. “결국 정치의 문제지요. 정치인들이 인간 생애를 통찰하는 철학과 정책을 선보여야 해요. 유권자들도 변해야죠. 노인들의 분노를 이해하고 달래야 해요. ‘그 동안 수고하셨다. 이제 우리가 정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해 삶의 질을 높이는 단계로 나아가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일흔이 되니 명실공히 노년인증서를 받아 든 기분”이라면서도, 그는 ‘이렇게 살아라’ 가르치려고 들지 않는다. “인생의 문제는 웃을 일들이지, 화낼 일들이 아니더라” “한 번도 웃지 않은 날은 망한 날”이라며 일상의 재미를 찾아서 나누는 데 집중한다. 독서는 그의 삶의 낙이다. 최근엔 한국의 젊은 독자들을 중심으로 반향을 얻은 일본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미나시타 기류의 대담집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일본 작가 사노 요코의 에세이 모음집들을 즐겁게 독파했다고 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인다는데, 사실 늘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요. 내 또래들은 폐쇄적인 ‘카톡 공동체’에만 머무르는 경향이 있어요. 유행하는 책도 안 읽고, ‘로코’ ‘츤데레’ ‘심쿵’ 같은 신조어도 잘 모르죠. 설명해도 ‘요즘 애들은 대체 왜 그렇게 말을 줄여 쓰냐. 세종대왕이 화내겠다’고 혀를 차. 그런 자세로 젊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겠어요?”

그가 품은 이야기보따리는 방대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가 나를 ‘롤 모델’이나 ‘멘토’로 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오래 살았다고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할 수 있나? 정답은 없어요. 그리고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예요. (웃음) 다만 여러분은 저보다 더 잘 살아야 하고, 더 훌륭해야 해요. 홀로 단절되지 않고, 재미있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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