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게 돌아다녔나, 옷차림 어땠나

‘슬럿 워크’ 시위 참가자들

“성범죄 책임은 가해자” 외쳐 

 

고통은 연대 아니라 존중의 대상

고통의 의미 부여에 몰두하는

피해자화의 정치학은 공론장 닫는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9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서 토론자들이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9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연 ‘길거리 괴롭힘·성폭력·성희롱 말하기대회’에서 토론자들이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말할 수 있는 장소의 등장

여성이 성과 사랑, 가족과 관련된 ‘문제’를 겪을 때 이를 공론장에서 말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일단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은 “왜 그런 사적인 문제를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라는 곤란한 얼굴을 마주한다. 반면, 사회와 국가, 세계와 관련된 ‘문제’를 공론장에서 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애초에 공론장의 목적이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듣는 용도이므로 사람들은 “왜 나한테?”라는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성, 사랑, 가족 등 사적 영역에 속하도록 사회문화적으로 강제되었고, 거기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장소’(place)가 없었다. 이런 이유에서 여성이 겪는 폭력은 가시화되기 어려웠다. 여성이 학교와 직장 등 다양한 장소에 등장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이기도 하다. 연애나 결혼과 같이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문제라고 해도, 거기에 부당한 폭력이 있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법과 제도가 개입해야 할 문제라는 점은 이제는 어느 정도 상식이 됐지만, 20년 전만 해도 입을 열기 어려운 문제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991년 개소된 이래 피해생존자들의 집단적 말하기를 거듭 시도한 끝에, 2003년에 처음으로 ‘성폭력피해생존자 말하기대회(speak-out)’를 개최할 수 있었다. 2003년 1회 개최 당시의 참여자들은 핸드폰을 반납하고 팔짱을 끼지 말라는 등 주최 측의 매우 엄격한 요구사항을 수용해야만 입장이 가능했다.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스피크아웃 행사는 회를 거듭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개방됐고 말하기 방식도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하는 등 여러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이 행사가 계속 유지되고 있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성폭력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있는 장소가 거의 없다는 걸 증명한다. 안심하고 말할 곳도 없고,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사회에서 성폭력과 가정폭력 피해를 공개적으로 말하는 일은 아직도 쉽지 않다. 이것은 피해자의 용기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청중이 있는지, 그 증언들은 사회적인 기억이 될 수 있는지 이런 점들이 여전히 의문투성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등장한 후 이전과는 다른 조건이 만들어졌다.

적어도 말할 수 있는 ‘장소’는 이제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SNS에서 시작된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지 6개월이 되어간다. ○○내 말하기는 무엇보다도 해당 집단 안의 성원으로 말을 건다는 점과 한 명의 개별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들이라는 집단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우리’ 안에 만연한 성폭력과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강간문화를 고발하는데 성공했다.

이것만으로도 한 발 더 나아간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부장적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질성을 가진 존재들이 연대해 다른 목소리를 내는데 성공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김은실은 한국의 남성 지식인 사회는 남성은 제도이며 집단이고 국가이자 법 그 자체로, 여성은 외부자로 취급해왔다고 분석한다.

즉, 이들은 성폭력에 대한 고발이 남성사회 전반의 문제로 비화되지 않도록 개별 남성을 희생시키고 문제적인 여성 집단의 합리성과 객관성을 끊임없이 의심하며, 결국 문제를 사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김은실, 2005). 그런데,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은 이러한 남성 사회의 ‘꼬리 자르기 전략’, 즉 가해자를 재빨리 분리하고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방식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바로 피해자화의 문제다. 

 

2월 17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사옥 지하1층에서 열린 ‘#문단_내_성폭력, 문학과 여성들’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창비 제공
2월 17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창비 사옥 지하1층에서 열린 ‘#문단_내_성폭력, 문학과 여성들’ 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창비 제공

여성 피해자화는 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

정희진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말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른다”고 쓴 바 있다.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성의 피해와 고통의 심각성을 인정하거나 공감하지는 않으면서, 여성을 피해자화하는 데는 익숙하다. 피해자학에서 말하는 피해자화(victimaization)란 보통 일정한 원인으로부터 범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범죄화(criminalization)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피해 발생에 이르게 된 일련의 과정을 추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피해자학 자체가 여성범죄피해자들이 사법 시스템에서 겪는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여성의 피해자화’ 문제는 두 가지 차원으로 전개된다.

첫째, ‘여성의 피해자화’는 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이다.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면 그럴만한 원인을 제공한 책임도 있다는 것이다. 밤늦게 돌아다녔는가, 술을 마셨는가, 옷차림이 어땠는가, 성적 농담을 즐기는가, 위험한 곳에 부주의하게 들어갔는가 등등. 이러한 피해자 책임론은 이중 기준과 문화적 압력을 넘어 범죄 여부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까지도 좌우한다. 1989년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일어난 스티븐 로드 사건의 경우, 가해자가 강간 사실을 시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그 안에 속옷을 챙겨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원은 무죄를 판결했다.

피해자의 옷차림에 책임이 있다는 가해중심시각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2011년 캐나다 토론토 경찰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성폭력예방교육을 하면서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창녀’(slut)처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격분한 여성들은 피해자에게 강간의 책임을 묻는 문화에 집단적으로 저항하며 ‘슬럿 워크(slut walk)’ 시위를 열었다. 이 시위는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30여개국에서 2011년부터 3~4년간 개최됐는데, 이 시위참여자들이 가장 많이 외친 구호는 “내 옷차림은 내 마음”이며, “성범죄의 책임은 가해자”라는 내용이었다.

둘째, ‘여성의 피해자화’는 피해자다움을 강요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그 일이 정말 피해였다면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 당신은 어째서 충분히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은가, 다음날 멀쩡하게 학교를 가고 출근을 했으며 친구들과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진짜 피해자가 맞는가.

이런 질문들, 익숙하지 않은가? 피해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피해자다울 것이 요구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피해자다움이란 고통 받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호소할 것, 결코 행복해지지 말 것,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존재라는 점을 드러내는 일을 포함한다.

내가 만난 집단성폭력 피해자인 희은(가명, 17세)은 “쟤가 걔야”라는 식의 뒷담화는 그래도 예상했던 거지만, 웃고 있는 자신의 옆을 슥 지나가며 그런 일이 있고도 웃음이 나오냐는 식으로 수군거리는 건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전학을 가기로 결정한 희은은 “제가 잘못한 거 아니니까 그게 창피해서가 아니고요. 제가 웃고 떠들 때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게 힘들어서 그래요”라고 말했다. 객관성과 합리성을 담보해야 하는 법관들조차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바로 증거를 수집하고 경찰에 신고하고 병원에 찾아간 피해자의 행동을 “너무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답지 않다”고 의심한다. ‘여성의 피해자화’는 성폭력을 여성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결과 위험상황에 자신의 몸을 부주의하게 노출한 문제로 만들어버린다.

피해자화의 또 다른 문제는 저항할 수 있는 집단적인 힘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 여성의 몸에 대해 남성중심사회가 부여한 구조적 제약을 수용하며 스스로 보수적인 편이라고 말하는 여성들은 강간 피해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는 여성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여성 스스로와 남성의) 욕망이라는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들이 때로 가장 적극적으로 피해자 비난에 합세한다는 점이다.

 

2004년에는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가 ‘그녀들의 목소리 세상을 울리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
2004년에는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가 ‘그녀들의 목소리 세상을 울리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피해자는 과거에, 가해자는 미래에

법정에서는 종종 피해자의 고통을 강조하며 “영혼의 살해”,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 말로 가해 행위의 유해성을 강조한다. 성폭력 피해 경험은 종종 평생 잊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기는 문제다. 특히 아동성폭력의 경우 더욱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후유증에 대한 강조가 ‘여성과 아동의 피해자화’라는 문제와 만나게 되면 다른 문제적 맥락이 발생하게 된다. 피해자는 자신의 감정과 상태가 피해자다운지에 대해 계속 살핀다.

“영혼이 살해되었다”고 말해지는 사람은 과연 나머지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씻을 수 없는 상처”라는데 왜 나는 괜찮은가. 괜찮아도 되는가. 나는 피해자가 맞는가. 이런 의심 말이다. 이렇게 피해자의 ‘고통’에 집중하는 것은 다시 피해자를 과거의 바로 그 순간에 살도록 한다. 피해자의 미래는 이미 기대될 수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반면 가해자는 사건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으며 자신에게는 미래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해자의 말은 변호사에 의해 가해자가 초범이었고,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촉망받는 미래의 인재라는 방식으로 인용된다. 법관들은 가해자의 미래를 판결에서 고려돼야 할 중요한 문제로 취급한다. 그 결과 피해자는 과거에, 가해자는 미래에 있게 된다. 성폭력이 어떤 사회적 해악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목록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점이 가장 부정의하다고 생각한다.

피해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증언하는 일은 종종 고통을 경쟁하고 증명하라는 함정에 빠지게 되고, 그 결과 고통 자체가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여성은 모두 잠재적 피해자라는 식의 말을 통해 여성경험의 공통성을 강조하는 것 말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선피해(pre-victim)의 준거지가 된다. 이런 피해자화의 해악은 너무도 커서 집단적 말하기의 힘을 부수고 개별 피해자들의 고통 경쟁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가부장적 규범과 강간 문화를 통해 가해중심적 사유가 굳어져 있는 사회에서 개인의 저항은 대부분 실패한다. 개인이 관행이나 인습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집단이 전체적으로 행동해야 가능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고통 경쟁의 방식은 피해자들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수년 전에는 자신을 아동성폭력 피해생존자라고 소개한 사람이 조직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다른 피해자에게 당신의 그 문제제기가 자신의 고통을 사소하게 만든다는 글을 모 진보매체에 싣기도 했다.

이러한 고통 경쟁은 성폭력을 다시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별 피해의 고통으로 초점을 이동시킨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는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개별 피해의 고통이 제대로 들려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회적인 문제 운운 하는 것이 운동과 이론이 피해자를 도구화한다는 비판이 있기도 할뿐더러, “모든 슬픔은 그것이 이야기로 만들어진다면 견딜만한 것”이 되니까 말이다(보리스 시륄리트, 1999).

문제는 트라우마를 야기한 사건의 경우 이야기로 만들어지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돼야만 비로소 경험에 시공간이 부여되고, 경험이 해석될 수 있는 지점(site)이 만들어져, 시간이 흐르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 없는 파편들, 말이 되지 못한 기억들, 육체의 기관들의 심리적 상태들이 자아에 통합되지 않고 불거져 나오는 증상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법기관에서 거절당하고, 사회로부터 낙인찍힌 경험들은 어떻게 말해질 수 있는가.

누구를 위한 지식인가

김은실은 ‘4·3 홀어멍의 말하기와 몸의 정치’라는 논문에서 “피해자들의 경험이나 기억의 재현은 파편화돼 있고 부분적이며, 말할 수 없음과 듣는 자에 대한 의심, 그리고 경험을 설명할 언어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부딪혀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특정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경험한 피해의 경험을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개인의 기억이 삶의 공동체와 공유되고 공동체의 역사적 지식이 될 수 있을 것인가”(김은실, 2016)

다시 말해, 고통에 대해 ‘말하기’란 경험이 들려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개인의 기억이 공동체의 역사적 지식이 되도록 만드는 ‘정치’다. 이는 얼마나 아픈지, 그 고통이 진짜인지 등 고통 자체의 물질성이 아니라 고통이 놓여져 있는 맥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일례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후유증 중 자기 자신을 ‘손상된 물건(damaged good)’이라고 생각하는 증상이 있다. 가해자가 자신의 욕망을 위한 수단으로 피해자의 몸을 이용하고, 그 몸은 이미 더럽혀졌다는 사회문화적 해석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피해자는 자신이 ‘이미 손상된 물건’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동성학대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공익광고에서는 구겨진 종이가 자주 등장한다. “한번 구겨진 종이는 다시 이전처럼 펴지지 않는다”는 메시지와 함께 아동성폭력을 예방하자는 공익광고 문구도 있다. 이 광고는 누구에게 말을 거는가? 가해자의 선의에 호소하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심각성을 환기하기 위한 것인가? 확실한 것은 피해자를 위한 메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공익광고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불가역적인 것으로 만들고 사물화시켜 시각화한다. 피해자들이 종종 이야기하는 “더럽혀진 것 같아요” “이미 버린 몸인데요, 뭐” 이런 식의 체념 자체가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변화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증거’로 사용하는 태도이다.

원래 ‘손상된 물건 신드롬’이라는 지식은 여성주의 상담이론가들이 고투 끝에 길어낸 지식이다. 매번 다시 학대가 일어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의 피해자, 성폭력을 당하고 난 뒤 이미 더럽혀졌으므로 아무에게도 보호를 요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10대 여성 등은 왜 더 나은 선택을 이미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여성주의상담이론가들은 이런 행동을 자신이 물건으로 취급받았던 바로 그 경험에 고착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손상된 물건 신드롬’이라는 지식을 통해 상담자들을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을 수 있었고 문제에 대한 해석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 지식은 상담자를 위한 것이자 피해자를 위한 지식이었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이 어떤 말과 몸으로 행동으로 드러나는지를 들으려 하지 않고, 고통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다시 이 지식을 가져다가 가해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사용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보라고, 그런 고통을 가하지 말라며 가해자의 ‘인간성’에 호소하고 설득한다.

왜 “한번이라도 타인의 몸을 자신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도구로 취급한 사람은 돌이킬 수 없이 인간성이 손상된다”는 식의 광고는 나오지 않는가. 왜 가해자의 행위는 법적 처벌과 강간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 해석되지만 피해자의 경험은 고통으로서만 재현되는가. 그리고 그 고통은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고통의 ‘무의미함’에 대해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타인이 경험한 고통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고통은 몸으로 겪고 시간을 버텨내는 과정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장 아메리는 고문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손상되었다”는 식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문당한 사람은 이 세계에 절대적인 지배자로서의 타자가 있다는 것을, 거기서 지배란 고통을 가하고 파멸시키는 권리로 드러난다는 것을 ‘경악’과 함께 경험한다.

장 아메리는 이미 자유로운 상태를 가정하고 사유를 전개한 유럽 형이상학자들의 지식이 전혀 고통을 다루고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고통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단언한다. 이 말은 강간에 대한 비유로 다시 이어진다. 그는 고문을 세상과의 신뢰, 타인이 나를 죽이려고 들 때 누군가 바깥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줄 것이라는 기대를 완전히 상실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하며 "고문, 그것은 두 당사자 중 한 사람의 동의가 없는 성행위, 즉 강간이다"라고 쓴다.

이 문장은 강간 피해자들이 고문 피해자와 얼마나 같은지, 혹은 다른 지에 대한 말이 아니다. 이 문장은 오히려 강간 피해의 핵심은 “내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혀 타인의 주의를 끌지 못했으며, 바로 그 점이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절멸시켰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성기가 삽입된 행위 자체, 그 행위가 야기한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월호부터 강남역까지 그 죽음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는지를 묻고 또 묻는다. 고통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도달하는 길 중 하나가 종교인 이유다.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한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시도하는 것은 상상해보는 것이다. “아 그런 일이 생겼다니 고통스럽겠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겪은 일 중에 비슷한 경험을 공감할 수 있는 증거라고 꺼낸다.

그 결과, 피해자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너희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고통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말, 고통 자체에 지지와 연대를 요청하는 말에 반대한다.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다시 문제를 당사자의 아픔에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당사자의 고통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의 대상이다. 당사자의 고통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고통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다른 글에서 나는 “우리가 피해자와 연대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자는 약속과 실천이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다. 고통은 어쩔 수 없이 개인이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때론 피해자가 열심히 도운 주변인들에게 ‘니가 내 고통을 알아?’라는 날 선 말을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런 피해자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 죄책감과 혼란에 주변인들이 괴로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사자가 아니면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라고 쓴 바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의 포스트잇과 세월호의 노란 리본은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감각, 거기서 연대가 시작됐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로서의 고통은 당사자의 몫으로 오롯이 남아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 고통 자체를 없애줄 수는 없다. 따라서 성폭력에 저항하는 운동은 성별 권력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지, 이 논의에 개입하는 사람들의 고통과 목소리의 투명함을 강조하는 형식이 돼서는 곤란하다. 고통 자체에 대한 몰두 다음에 오는 것은 정치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종교적 각성과 내적 치유를 강조하는 문화이고, 고통의 의미 부여에 몰두하는 피해자화의 정치학은 결국 공론장을 다시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필자 권김현영씨는 여성주의 연구모임 FICT와 성문화연구모임 도란스의 멤버다. 『양성평등에 반대하다』 『성폭력에 맞서다』『페미니스트 모먼트』 『대한민국 넷페미사』 등 다수의 공저가 있다. 최근에는 한국남성의 식민지 남성성을 화두로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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