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만든 김보람 감독·오희정 프로듀서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스틸컷 ⓒ오희정 프로듀서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스틸컷 ⓒ오희정 프로듀서

‘ㅅㄹ, 매직, 마법, 그날, 대자연, 달거리, 반상회’.... 인구의 절반이 경험하는 생리, 이렇게 돌려 말하고 쉬쉬할 일인가? 왜 한국 여성 대부분은 일회용 생리대만 쓸까? 일회용 생리대는 왜 이렇게 비싸? 다른 걸 써보면 어떨까?

올 하반기 개봉 예정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가 던지는 질문들이다. 생리와 생리용품의 역사를 소개하는 한편, 다양한 연령대와 배경을 지닌 여성들의 입을 통해 여성의 몸에 관한 낙인과 편견을 말한다. “한국의 문제이자 보편적인 문제”다. “남자들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에요. 여자들도 그간 당연히 여겼던 것들의 맥락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 거예요. 저희와 인터뷰한 분들은 ‘맺혀 있던 게 풀리는 것 같다’고 하셨죠.”(김보람 감독) 

 

‘피의 연대기’ 김보람 감독·오희정 프로듀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피의 연대기’ 김보람 감독·오희정 프로듀서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생리는 지금 가장 주목받는 페미니즘 이슈 중 하나다. 생리를 공공의 차원에서 논의하지 않으면 성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는 논의가 최근 전 세계에서 터져 나왔다. 미 공영 라디오 방송 NPR이 2015년을 ‘생리의 해’로 부를 정도였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말처럼 “여성이 세계 인류의 절반으로서 위상을 되찾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저소득층 여성들의 ‘깔창 생리대’ 문제가 주목을 받았다. 생리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는 여성들의 ‘생리대 시위’도 열렸다. 그러나 생리를 ‘여성 문제’로 치부하고, 생리대 지원·생리휴가 제도 등을 ‘시혜’ ‘역차별’로 보는 시선도 만만찮다. 비싼 생리대 가격 논란이 이어지면서 ‘반값 생리대’도 등장했지만, 기업의 선의에만 맡겨둘 문제는 아니다. 

김 감독과 오희정 프로듀서는 “생리를 ‘시민권’의 관점에서 볼 때”라고 강조했다. “인구의 절반이 겪는 문제죠. 우리 몸이 제어할 수 없는 일이고요. 생리로 인한 불편과 차별 해소, 시장 가격 문제 역시 국가가 나설 문제라고 봐요.” 

이들은 생리대를 ‘공공재’로 삼은 뉴욕시의 사례를 강조했다. 뉴욕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공립학교·교도소·노숙자 보호소 등에 일회용 생리대·탐폰 등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뉴욕시장이 ‘생리대 공공재’ 법안에 서명하던 날, 저희도 카메라를 들고 현장에 갔어요. 멜리사 사전트 시의원이 ‘남자는 화장실에 가면 필요한 모든 걸 구할 수 있지만, 여자는 아니다’라고 말했죠. 시장은 ‘생리대 무상 제공은 모든 시민에게 중요하고 긍정적인 일이며, 시의 이상에도 한 발짝 다가서는 일’이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어요. 큰 깨달음을 얻었죠.”

 

지난해 7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일대에서 열린 ‘생리대 프로젝트’ 현장. 생리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부담스러운 생리대 가격을 내리자는 등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세아 기자
지난해 7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일대에서 열린 ‘생리대 프로젝트’ 현장. 생리에 관한 사회적 편견을 깨고, 부담스러운 생리대 가격을 내리자는 등 다양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이세아 기자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스틸컷 ⓒ오희정 프로듀서
다큐멘터리 ‘피의 연대기’ 스틸컷 ⓒ오희정 프로듀서

생리를 다루는 다큐답게 연출·프로듀서·촬영감독·애니메이터와 사운드 등 주요 스탭은 모두 여성이다. “다큐 PD·작가 일을 하는 동안 주변엔 늘 남자 스탭뿐이었어요. 여자들끼리만 일하면 어떨지 궁금했죠.” 이들은 ‘언니’ ‘야’ 대신 ‘○○씨’라며 서로 존대하기로 했고, 친해진 후에도 약속을 지켰다. “참 좋았어요. 위계 없는 ‘동지’랄까. 특별한 공동체 의식이 생겼죠.”

다큐엔 “생리 경력 15년차 제작진”의 다양한 생리용품 체험기도 수록됐다. 생리컵, 해면 탐폰, 착용하고 섹스할 수 있는 생리대 등 국내에선 생소한 제품까지 제작진이 직접 써봤다. 

제작 기간 1년 동안 제작진의 인식도 변했다. “생리혈, 내 질을 더럽고 냄새나는 것으로 보지 않게 됐어요. 생리대에 묻은 피가 냄새가 나는 건 산화됐기 때문이에요. 생리컵에서 방금 뺀 피는 정맥을 흐르는 피와 똑같아요. 변기에 버리면 빨간 물감처럼 예쁘게 번져요. 그걸 보는데 쾌감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생리가 끔찍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했죠.”(오 프로듀서) 

오 프로듀서는 “내 몸에 맞는 생리용품을 알고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을 뿌듯한 변화로 꼽았다. “저는 제 질을 잘 몰랐어요. 만져본 적도 없고. 생리컵을 넣기 위해 큰 용기가 필요했죠. 해보니까 (질이) 생각보다 크고 유연하고 튼튼해서 딱딱한 게 잘 맞았어요. 제가 초경 때부터 다른 건 엄두도 못내고 ‘화XX’ 대형만 썼거든요. 요샌 해외 출장길엔 다양한 생리용품을 이만큼 사와요. 그걸 본 아주머니들이 ‘어머 이런 걸 내놓으면 어떡해’ 하고 놀라시고(웃음).” 

“저도 예전엔 질이 ‘공간’인 줄 몰랐어요. 질 근육이 그렇게 유연한지도 몰랐죠.” 김 감독이 말했다. “요즘 세대는 다를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인터넷에선 ‘탐폰을 넣으면 처녀막이 안 찢어지냐’는 질문을 쉽게 볼 수 있어요. 많은 여성들은 ‘남성의 것이 질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게 들어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놀랍고 안타까웠어요.”

 

 

최종본은 모션그래픽, 인터뷰, 애니메이션을 합한 75분짜리 다큐가 될 예정이다. 단편 애니메이션 ‘심경’으로 세계적 호평을 받은 김승희 감독이 참여해 여성의 몸과 심리를 아름다운 선과 색감으로 표현했다. “이 문제에 관심이 없는 고등학생들도 웃으면서 마지막까지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을 지향한다. “피칭 단계에선 ‘더 깊이 있는, 센’ 내용을 주문받기도 했지만, 결국 최대한 많은 이들이 쉽게 즐길만한 작품을 만들기로 했어요. 대학생들 반응은 폭발적이에요. 남성들도 신기하고 재미있어 해요. ‘여성 다큐’란 편견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기뻐요. 우리 작품이 자극제가 돼 또 다른 심도 깊은 생리 다큐가 나올 수도 있겠죠.”(김 감독)

국내외 유수의 영화제도 이 작품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칭 프로젝트 1등상인 피치&캐치 옥랑상, 인천다큐포트 K-Pitch, 부산국제영화제 AND 펀드 지원을 받았다. 영국 셰필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 독일 라이프치히 영화제 유망 프로젝트로도 선정됐다. 

마지막 질문. 피할 수 없는 생리란 여성에게 저주일까 축복일까. 다큐에선 이를 다루지 않지만, 제작진은 “현대 여성에게 생리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고 봤다. 실제로 유럽에선 생리를 피할 목적으로 팔뚝이나 자궁에 피임기구를 삽입하는 여성들이 많다. 생리양이 극소량으로 줄거나 아예 사라진다고 한다. “요즘 여성들은 임신·출산 경험률이 낮아서 생리를 자주, 오래 하죠. 생리 탓에 고통 받거나 중요한 기회를 놓치기도 해요. 네덜란드에선 국가가 이런 여성들을 위해 피임시술 비용을 지원해요. 생리를 여성의 선택으로 보는 거죠. 한 네덜란드 여성은 ‘생리 없이 산지 12년이 됐는데 너무 좋다. 팔뚝 칩만 3년마다 보건소에서 교체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생각해 볼 문제죠.” ‘피의 연대기’는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형식으로 투자를 받고 있다. 올 6월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리미어 상영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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