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여성신문 신년기획] 눈치 주는 사회 ⑧

임신부 위해 도입된 지하철 임산부석

전용좌석 아니라 비어있는 경우 드물어

주5일 지하철 이용하던 임신부는

한 달간 단 2번만 임산부석 앉아

허리 아파 노약자석 앉았다 봉변도

임신부 배려하는 문화 확산돼야

 

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남성이 앉아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7일 서울 지하철 2호선 임산부 배려석에 남성이 앉아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임신이 대수냐, 애 뱄으면 집에 가만히 있어야지. 왜 북적이는 데를 돌아다니냐.”

인천 논현동에 사는 진은경(36)씨는 지하철 ‘임신부 배려석’(이하 임산부석)에 앉은 한 중년 여성에게 “오랫동안 서있었는데 양보해주시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했다가 막말을 들어야 했다. 17개월된 아들을 키우는 진씨는 만삭 때까지 매일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해 출퇴근했다. 하지만 임신부를 위해 도입했다는 일명 ‘핑크의자’는 있느마나였다. 출입구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임산부석이 비어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누가 봐도 만삭인 진씨가 서있어도 자리를 양보해주는 사람은 적었다. 건장한 남성이 ‘모르는 척’ 임산부석에 앉아 있다 내렸으나 자리를 가로챈 이는 진씨가 아닌 중년 여성이었다. 진씨는 “아주머니의 말에 사람들 시선이 몰리고 자리에 앉는데 정말 울고 싶었다”고 토로했다.

분홍색으로 치장한 지하철 임산부석이 확산되고 있지만 정작 임신부가 앉기는 힘들다. 출입문 바로 옆 ‘로열석’인데다 전용좌석이 아닌 까닭에 자리가 비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보건소에서 나눠주는 ‘임신부 배지’를 달고 있어도 자리를 양보하는 이도 손에 꼽을 정도다. 임신부를 배려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임산부석은 임신부에겐 ‘그림의 떡’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지하철 임산부석은 2013년 정부의 요청으로 도입돼 확산되고 있다. 기존에는 열차 한 칸 당 2개의 임산부석을 지정해 스티커를 붙였다. 하지만 승객이 자리에 앉으면 임산부석을 알리는 스티커가 가려져 2015년부터는 좌석을 임산부 배려석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분홍색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이 자리는 임산부를 위한 자리입니다. 양보해 주세요’란 안내문도 설치했다. 서울메트로는 현재 지하철 1~4호선 임산부석 3908석을 모두 일명 ‘핑크카펫’으로 바꾼다는 계획이다.

임산부석이 눈에 띄는 디자인으로 바뀌었지만 피부에 와닿는 변화는 크지 않다. 온라인의 ‘지역카페’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임산부석 마저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을 성토하는 글이 줄을 잇는다. “남자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길래 임신부 배지를 꺼냈더니 스마트폰을 꺼내 게임만 하더라” “임산부석에 누군가 앉아있으면 노골적으로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것 같아 그 앞에 서기 꺼려진다” “할아버지가 타더니 다짜고짜 ‘어린데 왜 안일어나느냐’고 해 얼떨결에 일어났다. 임산부석인지 조차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등의 불만이 주를 이룬다. 임산부석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경우도 많았다. “배려를 왜 강요하느냐” “임신한 척하면서 임산부석에 앉는 여자들이 문제다” “임신이 벼슬이냐” 등의 비난글도 상당하다. 실제로 지하철 임산부석을 알리는 표지에 검정색 펜으로 ‘X’를 쳐놓은 경우도 있다.

임신 16주차인 남모(32)씨는 지난 12월 한 달 동안 지하철 4호선과 수인선 일부를 이용하며 임산부석이 비는지 조사를 했다. 평일에는 오후 2시부터 4시 30분 사이에, 오후에는 8시부터 10시 사이에 주로 살폈다. 남씨는 “임신을 하고 정보를 검색하다 온라인 카페에서 임산부석은 아줌마가 차지한다는 글을 봤고, 언론에서도 여자가 배려를 안해줘 더 상처가 크다는 기사를 보고 진짜 그런지 궁금했다”고 했다.

결과는 달랐다. 흔히 ‘아줌마’가 임산부석을 차지하고 비켜주지 않는다는 인식과 달리 자리를 차지한 사람 50% 이상은 남성이었다. 특히 낮 시간 대에는 20대로 보이는 남성이 임산부석에 앉는 경우가 많았다. 남씨는 “정말 힘들 때 임산부석은 ‘사막에 오아시스’ 같을 정도로 임신부 입장에선 필요한 제도”라면서 “다만 임산부석이 확산되려면 임신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힘든지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임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받지 못하면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논의도 사실 무의미 하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임신부들은 교통 약자인 임신부를 배려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문화가 조성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8007명(임신부 2531명, 일반인 547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임신부의 59.1%만 배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받은 배려로는 좌석양보가 59.4%로 가장 많았고, 근무시간 등 업무량 조정(11.5%), 짐 들어주기(9.2%), 술 권하지 않기(8.9%), 줄서기 양보(4.3%) 순이었다.

임산부는 자신들이 배려받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로 ‘(일반인이) 배려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44.7%)라고 답했다. 일반인의 상당수는 ‘임산부인지 몰라서’(49.4%) ‘방법을 몰라서’(24.6%), ‘배려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4.3%) 등의 이유로 임신부를 배려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임신으로 인한 여성의 신체 변화에 대해 널리 알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배려를 늘려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진씨는 “임신부 배려석이 안착되려면 임신부가 배려의 대상이라는 데 논란없이 합의하는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면서 “지하철을 타면 ‘지금 계신 칸에 임신부가 타고 있을 수 있으니 자리를 비워두자’라고 방송을 하거나 학교와 공공기관, 회사 같은 데서도 약자와 배려문화에 대한 인권감수성 교육을 통해 문화를 바꿔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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