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_내_성폭력’ 이후 시작된 변화들

여성 시인, 개인 힘으로 출판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항목 추가 이뤄내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이후 5개월이 흘렀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문단 내 성폭력’ 피해당사자인 임솔아 시인은 두 달간 홀로 싸워 출판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추가시켰다. ⓒ이재원 작가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이후 5개월이 흘렀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문단 내 성폭력’ 피해당사자인 임솔아 시인은 두 달간 홀로 싸워 출판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추가시켰다. ⓒ이재원 작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이 시작된 지 5개월이 흘렀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해 문인들이 유죄판결을 받거나 구속됐고, 보복성 ‘역고소’를 당한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됐다.

2013년 시 ‘옆구리를 긁다’가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며 등단한 임솔아 시인도 변화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장편소설 『최선의 삶』(문학동네)을 발간했던 임 시인은 최근에는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문학과지성사)을 내며 활발히 활동 중이다.

‘문단 내 성폭력’ 피해당사자인 임 시인은 지난달 24일 문학과지성사(이하 문지) 출판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추가시켰다. 두 달간 홀로 싸워 얻어낸 결과다. 문지에서 문인과 출판사 간 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넣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음은 계약서에 새로 추가된 관련 항목이다.

△갑의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범죄 사실이 인지될 경우 을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으며 갑이 을로부터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적인 괴롭힘을 당한 경우 갑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제가 문지에 제안했던 것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계약서에 성폭력 관련 조항을 넣고 싶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판권 자리에 문단 내 성폭력 관련 문구를 넣고 싶다’는 것이었죠.” 임 시인의 말이다.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고발이 이어진 후, 문단 내에선 문지에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제기됐었다. 문지가 지닌 ‘문학권력’과 문단 내 만연한 성폭력이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였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 상당수는 문지에서 시집을 냈고, 문지가 개설한 시 창작 강의를 빌미로 성폭력을 일삼기도 했었다. 이에 한 남성 시인은 지난해 11월 문학계 권력 중심에 있는 문지의 영향력을 언급하며 ‘출판 표준계약서 성폭력 관련 항목 추가’ 등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임 시인의 이번 사례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운동으로 일궈낸 작지만 의미있는 성과로 볼 수 있다. 

 

임솔아 시인. ⓒ임솔아 시인 제공
임솔아 시인. ⓒ임솔아 시인 제공

임 시인은 문지와의 계약에 앞서 성폭력 관련 조항으로 다음의 세 가지 조항을 추가해줄 것을 제안했다.

➀갑의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범죄 사실이 인지될 경우 을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➁갑이 을의 구성원으로부터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적인 괴롭힘을 당한 경우 갑은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➂갑이 을의 구성원으로부터 성폭력, 성희롱 그 밖의 성적인 괴롭힘을 당한 경우 을은 행위자에 대해 해임이나 징계 또는 이에 준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는 경우 가해자에 대한 관리, 부실, 손해배상책임은 을에게 있다 (갑-문인, 을-출판사)

하지만 문지는 임 시인이 제안한 조항을 모두 받아들이진 않았다. 임 시인은 “첫 번째 조항은 이 조항을 사용하길 원하는 저자에 한해서만 쓸 수 있다는 답을 받았다”고 했다. 두 번째 조항의 경우 을의 구성원에 편집위원, 기획위원, 동인 등은 포함할 수 없으며, 다만 편집자와 디자이너, 마케터 등은 포함시킬 수 있다고 답변 받았다. 세 번째 조항은 아예 불가하다는 답을 받았다.

임 시인은 두 번째 조항에서 편집위원, 기획위원, 동인 등을 ‘을의 구성원’에 포함하지 않고 직원(편집자·디자이너·마케터)들만 포함시키겠다는 문지의 입장에 반대했다. 이어 문지 전체를 을에 포함하는 내용으로 2차 수정을 제안했다. 그 결과 ‘을의 구성원’을 ‘을’로 변경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판권 자리에 문단 내 성폭력 관련 문구를 넣고 싶다’는 제안은 ‘표사 자리에 반 성폭력 문구를 넣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쉬운 점은 해당 계약서가 임 시인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이다. “전체 작가들에게 해당되는 표준계약서 조항은 추후 논의가 필요한 상태”라고 임 시인은 전했다.

출판사와의 싸움은 쉽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임 시인은 두 달간 긴 터널을 홀로 묵묵히 걸었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운동 이후 젊은 여성 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 됐어요. 주변 동료 분들께서 많은 응원을 해주셨고, 출판사 대표를 설득하는 과정에 함께해주신 분들도 있어요.”

임 시인은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작가들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며 “성폭력 관련 조항이 표준계약서에 들어갈 때까지 많은 작가들이 함께 힘을 합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 시인은 2011년 등단 전 습작생 시절, 중견시인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가해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다수의 시집을 낸 중견 남성시인이다.

지난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문단_내_성폭력’ 고발운동이 불던 당시, 임 시인은 해시태그를 단 고발에 참여하진 않았다. 대신 출판물에 성폭력 경험을 기록한 글을 실었다. 출판사 봄알람이 펴낸 『참고문헌 없음』과 격월간 독립잡지 『더 멀리』에 성폭력 피해사실을 증언한 글을 수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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