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사냥 최대 희생자는 사회 약자

가난하고 늙은 과부에 가해진 폭력

 

남녀가 평등한 유대관계 맺고 협력

남성지배의 ‘칼’의 문화에 대항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성배’문화 지향

 

도시의 전사가 된 여성들. 도시들 간의 갈등과 전쟁은 여성들까지도 무기를 손에 잡게 했다.
도시의 전사가 된 여성들. 도시들 간의 갈등과 전쟁은 여성들까지도 무기를 손에 잡게 했다.

유럽 중세는 교회를 통해 아주 높은 정신성을 추구했던 시대다. 고딕 성당의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 성경 필사본의 삽화와 글씨까지도 기독교인의 영성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한편으로 만성적인 전쟁이 끝도 없이 이어진 폭력의 시대였다. 봉건기사들에게 전쟁은 토지를 늘리는 영리사업이었고 십자군 전쟁의 주된 목적도 토지 획득에 있었다.

봉건 전쟁은 더 권위적인 사회구조와 더 강한 남성폭력을 계속 만들어냈다. 중세사회가 하층계급 여성에게 가장 폭력적이었을 것임은 그 폭력성을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마녀사냥의 최대 희생자가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가난하고 늙은 과부였다는 사실이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중세여성들은 여성성에 대한 존중과 여성적 문화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이는 매우 놀랍고 소중한 역사적 경험이다. 그들이 원한 것은 남성지배에 대항하는 여성지배가 아니라 남녀가 평등한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하는 평화로운 사회, 여성학자 시어도어 로작의 표현을 빌면 ‘남녀유대’의 사회다. 리안 아이슬러의 용어로 말하자면 남성지배의 ‘칼’의 문화에 대항해 남성 지배 이전처럼 평등하고 평화로운 ‘성배’의 문화를 세우는 것이다.

여성들은 사회문화 변화의 조짐을 놓치지 않고 동지적인 남성들과 함께 더 큰 변혁으로 이끄는 전략과 힘을, 평화로운 시대가 더 평등하고 더 창조적인 시대임을 증명했다. 이단 취급 받고 소멸해 간 운동조차도 후대에 기억과 자취를 남겨줬다.

지금 세계는 국지적 전쟁과 테러, 내전과 살육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기후변화로 인한 생태계 위기도 심각하다. ‘남녀유대’의 평화 세상을 꿈꾼 중세 여성들의 역사는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다.

 

사냥에 나선 귀족 여성. 전쟁과 사냥으로 자주 성을 비우는 남편을 대신해 자녀 교육부터 장원 관리까지 많은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사냥에 직접 따라 나서기도 했다.
사냥에 나선 귀족 여성. 전쟁과 사냥으로 자주 성을 비우는 남편을 대신해 자녀 교육부터 장원 관리까지 많은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사냥에 직접 따라 나서기도 했다.

중세 여성의 삶 돌아보기… ‘이브’ 로 살아가다

중세여성의 삶은 기본적으로는 신분으로 정해졌다. 귀족 여성은 남편처럼 장원 관리자이자 농민지배자였으며 수녀원장은 고위 성직자들과 더불어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수녀원 영지에서 영주권을 행사했다. 농민여성은 육아, 옷감 짜기, 가사 노동만이 아니라 쟁기질만 빼고 남성들과 모든 밭일을 함께 했다.

한편으로 모든 여성은 교회법과 세속법상 남성보다 열등했다. 예컨대 세속법상 귀족여성이라 하더라도 공직자, 군사지도자, 재판관, 법률가가 될 수 없었으며, 교회법상 수녀조차도 예배집전, 성직수임, 설교 모두 할 수 없었다.

여성을 ‘악마로 이끄는 통로로서의 이브’로 정의하고 여성들의 열등한 지위 정당화에 앞장 선 것은 교회다. 교회가 토지와 권력을 소유한 지배자였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교회는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공식화하고 생명, 부드러움, 평화를 대변하는 여성성은 가치 없는 것, 전쟁과 폭력, 남성 지배는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극심하게 가부장적이었던 유대 문화 속에서 예수는 여성들을 직접 가르쳤으며 동등한 존재로 대우했다. 반면 바울은 원죄의 장본인은 이브라고 주장했는데, 기독교 초기교부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을 따랐다. 역사학자 듀랜트 부부 지적처럼 예수 가르침을 왜곡하여 도덕적으로 역행한 것이다(바울의 저서로 위조된 『디모데 서』를 정전으로 인정하고 여기서 바울이 밝힌 반여성적 입장을 강조했다는 주장도 있다).

성직자들의 금욕을 이상화한 수도원 제도가 완성될 때 쯤 성직자들은 여성을 최고의 사탄으로, 결혼생활을 인간 삶의 “타락한 상태”로 간주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따르면 양성 간의 평등은 원죄 이전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남성에 대한 여성 종속은 당연한 것이었다.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논리와 분별력을 가지고 태어나며, 여성은 남성의 이미지대로 만들어졌을지라도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밭일 하는 농민 여성.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해 부역노동까지 해야 하는 중세에서 가장 바쁘고 고단한 삶을 사는 집단이었다. 그 고달픔 덕에 농민 남성에 대해 상대적인 평등을 누리기도 했다.
밭일 하는 농민 여성. 가족의 생계 유지를 위해 부역노동까지 해야 하는 중세에서 가장 바쁘고 고단한 삶을 사는 집단이었다. 그 고달픔 덕에 농민 남성에 대해 상대적인 평등을 누리기도 했다.

마녀사냥은 가장 극단적인 여성폭력

‘이브’는 여성차별 정당화를 넘어 여성에 대한 폭력을 촉발했는데 마녀사냥은 가장 극단적인 예다. 수세기 동안 교회는 마녀사냥을 직접 지시했으며, 남자들은 수천 혹은 수백만 명의 ‘마녀들’을 찾아내 고문하고 대부분 화형에 처했다. 『마녀를 때리는 망치 』에서 교회는 여성을 ‘모든 악의 세속적 근원’으로 비하했다.

마녀사냥은 13세기 교회에서 교육받은 남자 ‘의사들’(이들은 사실상 의학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이 황제와 귀족들을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으로 치료를 담당했던 ‘현명한 여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중세 말 여성들의 저항-여성들이 문화적 주도권을 갖고자 한 궁정식 사랑, 카타르 운동을 비롯한 이단 운동, 농민과 도시 소상인 여성들의 농민반란과 도시반란 참여-과 같은 남성지배에 위협 요인을 제거하는 합리적 수단이 됐다.

교회는 ‘이브’ 혐오와 더불어 ‘마리아 숭배’를 강조했는데, 마리아 숭배에 만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역사가들은 교회가 상황에 밀린 것이라고 본다. 초기기독교 시기에 어머니 마리아 강조가 시작된 것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는 아리아인들에 맞서 인간 그리스도 관념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12세기에 모든 은총을 중개해주는 존재로서의 성모 관념을 더 정교화한 것도 사실은 12세기의 도시 성장과 사회경제 변화에 따른 여성들의 지위 개선을 받아들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남녀유대의 평화로운 세상 꿈꾸기

그노시스파 운동은 중세초 여성들이 남녀유대 체제를 꿈꾼 첫 번째 시도다. 로마제국의 가부장제와 황제권력 붕괴를 배경으로 그노시스파 기독교는 높고 신성한 진실의 신비는 신성한 지식(그노시스)을 쌓으면 혼자서도 알 수 있다고 확신했다. 권위적인 사제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공물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또 구성원 간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엄격한 평등 원칙을 유지했다. 엄격한 위계에 따라 권력을 잡은 남성지배적 기독교도들은 그노시스파를 혐오했으며, 결국 ‘정통’기독교 사제들은 그노시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아가페, 곧 형제애를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낙인찍은 것이다.

12세기는 여성들이 수공업자나 상인으로 스스로 사회경제적 변혁의 주체가 된 시기인 동시에 교회 개혁에 적극 동참한 시기였다. 10세기 프랑스 남부 클뤼니수도원에서 청빈을 내세우며 시작된 교회개혁 운동은 12세기에 세속인들 사이의 대중운동으로 확산돼 카타리파, 발도파, 바가드파 외에도 다양한 소규모 종파들을 탄생시켰다. 이들의 공통점은 성모 마리아를 ‘사상의 여신’으로 숭배하고, 청빈과 순결한 사랑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카타리파는 윤리적으로 엄격한 신앙 생활을 내세웠고, 사제들도 노동으로 양식을 마련했다. 여성에게도 사제 서품을 했으며, 여성 사제는 설교만 한 게 아니라 여성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생활했으며 여성 사제들을 양성했다. 카타리파가 1184년 베로나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기 전 이름이 알려진 사제 중 65% 정도는 귀족이 아닌 신분이었고, 귀족 출신 카타리 성직자의 69%가 여성이었다.

발데스와 그의 추종자들로 이뤄진 발도파 역시 청빈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설교공동체로 불릴 만큼 대중과 직접 만나고 공개설교하는데 열심이었다. 나아가 남녀 모두에게 설교와 포교권을 부여해 평등을 실현했다. 수공업을 경영하면서 교세 확장과 생계유지를 병행했는데, 가난한 여성과 귀족 여성이 함께 노동하는 수도공동체도 만들어졌다. 본거지 리용에서 쫒겨나는 박해도 견뎌냈던 발도파는 1184년에 카타리파와 함께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14세기에 몇몇 발도파 공동체들은 여성의 설교권과 예배 집례권을 박탈했다. 박해 대신에 권리포기를 택한 것이다.

여성적 가치 추구한 음유시인 여성들

12~13세기 프랑스 남부에서 왕성했던 음유시인들의 활동도 흥미롭다. 11세기는 봉건제가 안정되며 봉건사회 내부 전쟁은 줄어들고 대학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12세기 들어 사회경제 변화와 더불어 문화 발달도 두드러졌다. 여성들이 남녀유대를 실천하기 좋은 시기였던 셈이다. 그러자 국가와 교회는 집권적 제도를 도입하며 상충계급 여성들의 지위와 역할을 누르기 시작했으며, 여성들은 문화운동으로 이에 대항했다.

음유시인들 중에는 상당수의 왕족이나 귀족 여성들이 있었다. 12세기 아키텐느궁의 엘리오노르 여왕과 그의 딸 마리, 알릭스, 백작 가문 여성들인 베아트리스 디 디아와 가르셍다 드 프로엔자가 대표적이다. 당시 음유시인들의 시와 인생의 주요 주제는 여성을 향한 고귀한 사랑과 존경이었다. 그들은 크레타 문명과 신석기 문명시대처럼 여성을 지배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강력하고 존중할 만한 존재로, 남성을 지배적이고 잔인한 존재가 아니라 명예롭고 부드러운 존재로 보았다.

궁정식 사랑은 여성들 대부분의 실제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것 자체가 귀족 계급 남녀에게 한정된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성들의 작품 속에는 여전히 여성혐오적 빈정거림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적 가치와 남성적 가치의 갈등의 역사를 분석한 고든 라트레이 테일러는 남성의 야만성과 방탕함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기사도, 부드러움, 명예, 낭만적인 사랑을 주장한 것은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여성적’ 가치를 통해 서구 역사를 인간화시켜 약자, 어린아이, 여성들에 대한 존중의 이상을 남겨주었다는 것이다.

 

크리스틴 드 피잔. 저작을 통해 여성을 변호하고 여성모독에 항의한 최초의 여성 작가였다.
크리스틴 드 피잔. 저작을 통해 여성을 변호하고 여성모독에 항의한 최초의 여성 작가였다.

집필로 생계 유지한 첫 여성 크리스틴 드 피잔

크리스틴 드 피잔은 봉건사회 해체기인 14세기에서 15세기 전반에 걸쳐 살았다. 대학에서 직접 수학한 것은 아니나 시민계급 출신으로 아버지로부터 문학과 천체과학 등을 배웠다. 이른 나이에 가진 재산도 없이 세 자녀를 거느린 과부가 되어 집필과 필사로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는데 이는 피잔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그는 프랑스사에서 집필로 생계 유지가 가능했던 첫 여성이었으며, 저작을 통해 여성을 변호하고 여성모독에 항의한 최초의 여성 작가였다. 상층계급 여성에게는 충고를, 중산층과 하층 계급에게는 애정을 보냈다. “오늘날 나와 같은 과부들의 곤궁이 이러하다”고 탄식하며 과부들의 처지를 대변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여성의 가치와 재능을 증명하고, 여성들도 남성들만큼 배우는 능력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장미의 이야기』처럼 여성을 사악한 유혹자로, 성적 약탈 대상으로, 변덕스럽고 무능한 거짓말쟁이로 그렸던 남성들의 여성혐오 서적들에 맞섰다. 훌륭한 여성들을 열거하면서 여성에게는 스스로를 남성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특수한 자질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성들은 관대하고 부드러우며, 친절하고 본성에 있어 충실하고,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 중 하나인 모성을 독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쟁과 그 횡포를 비판하고 전쟁고아와 과부들이 처한 ‘운명’에 저항해 여성의 신체적, 사회적 조건을 보편적 가치를 가진 문제로 승화시켰는데, 당시 남성작가들로부터는 볼 수 없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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