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6차 촛불집회에 안희정(왼쪽) 충남지사와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2월 18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16차 촛불집회에 안희정(왼쪽) 충남지사와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참석해 자리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민주당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 간의 논쟁이 한동안 화제가 됐다. 발단은 안 지사가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 “선한 의지로 좋은 정치를 하려고 했는데 법과 제도를 따르지 않아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취지로 발언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문 전 대표가 “안 지사의 말 속에 분노가 빠졌다”면서 “분노는 정의의 출발”이라고 지적하자 안 지사는 “지도자의 분노는 피바람을 일으킨다”고 맞대응했다.

그러자 다시 문 전 대표는 “우리의 분노는 사람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라면서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심 없이 어떻게 정의를 바로 세우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안 지사는 “분노는 정의의 출발점이지만 그 실천과 마무리는 사랑”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야권의 전통적 지지층 이탈 가능성에 대한 우려로 안 지사는 결국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 문 전 대표가 제기한 ‘분노’는 최근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정치권을 뒤흔들고 있는 ‘키워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세계화의 물결에 소외된 채 표류하던 저학력, 저소득의 백인 블루칼라 노동자의 분노를 표로 결집해 백악관에 입성했다. 지난해 6월 영국이 유럽연합(EU)에서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결행한 데에도 유럽통합으로 인한 전통적 산업구조의 왜곡에 따른 소득 감소와 실업 위기에 직면한 저소득층 영국인의 분노가 자리 잡고 있다.

오는 5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프랑스판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당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대표가 무슬림에 대한 반감을 확대재생산하며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다. 마약 사범들에 대해 법적 절차 없는 즉결처분으로 국제적으로 비난받고 있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에도 기존 정치권에 대한 분노와 환멸이 깔려 있다.

최근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인 채텀하우스가 유럽 10개국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평균 55%가 무슬림 이민 중단에 찬성했으며 특히 오스트리아, 폴란드, 헝가리,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 찬성 비중이 높았다. 이들 국가는 대부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테러 공격을 당했거나 난민유입 사태로 위기를 겪었다. 정착 지원 비용, 치안 불안 등이 대중의 불안과 무슬림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다. 이처럼 전 세계 주요 국가의 선거에서 현실 정치나 특정 세력에 대한 유권자의 분노와 반감을 정치세력화에 이용하는 정당들이 득세하고 있다.

한 집단의 정체성은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우리 편이 아닌지를 규정하면서 분명해지고, 이는 집단을 결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타자화’란 사회심리학 용어가 있다. 사전적으로는 특정 대상을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말과 행동, 사상 등의 총집합이라고 정의된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서방진영과 공산진영이 서로를 타자화해 진영의 결속력을 강화했다. 소련의 몰락 이후 새로운 타자를 설정하지 못하던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슬람과 중국을 새로운 타자로 삼으려 하고 유럽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이슬람을 타자화해 대중에 영합하고 있다. 타자화 전략이란 한마디로 국민들의 분노를 표출할 ‘공공의 적’을 설정해 세력을 확장하거나 집권을 영속화하는 전략이다.

우리나라도 조기 대선이 확실시되면서 벌써부터 정당 간 혹은 대선 주자 간 타자화가 진행 중이다. 누군가를 적으로 삼는 타자화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효과적일지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결코 지속하기가 힘들다. 분노는 파괴를 불러올 뿐, 안정과 번영을 보장하지 못한다. 세상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분노가 아니라 선의다. 분노를 부추기는 정치에 우려의 눈길을 보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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