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오늘 일이 생겼다. 일요일 아침부터 부산을 떤다. 마치 인생에 있어서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해치우겠다는 듯이, 전장에 나가는 군인처럼 아침부터 서두는 폼이 심상치가 않다. 아내가 오늘 가는 곳은 그녀 집안의 선산이 있는 용인시의 모 지역이다. 그 선산은 요즘 아파트를 짓는 택지 지역으로 지정되어 토지 보상이 한창이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모인 여자 분들이 모두가 머리에 띠를 매고 허리에 구호가 적힌 띠를 두르고 있단다. 아내가 데모를 하는 이유는 뭘까? 답은 바로 여성차별에 대한 항거다.

내가 4년 동안 대학의 법학과에서 배운 바로는 우리 나라는 남녀평등 사회다. 물론 그것은 형식의 허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오늘따라 새삼스레 느껴진다. 아내 집안의 선산인 용인시 동백지구가 택지보상지구로 지정되어 보상을 받게 되었단다. 그런데 아내의 성인 성주 이씨 총제공파 종중에서 결정 내리기를, 모든 성주 이씨에게 토지 보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단다.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다. 그 이씨들 중에서 결혼한 딸은 제외시키기로 결정을 한 모양이다. 종중이 내세우는 바는 그들의 논리를 빌자면 이렇다. 시집간 딸은 자신들의 집안 사람이 아니라 남의 집안 사람이라는 거다.

그러면서도 결혼하지 않은 딸에 대하여는 아들과 같이 보상금을 지급한다. 어찌 보면 이건 뻔히 보이는 행태다. 결혼하지 않은 딸을 둔 가장들은 미혼의 딸 몫으로 한 몫을 더 챙기게 된다. 결과적으로 남자의 절대적인 우월이다. 재산 분배를 두고 이렇고 저렇고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종중 재산은 총유로 되어 있어 종중 회의의 결정이 재산의 처분을 지배한다고 되어 있는 잘못된 민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는 지금 법적인 문제를 여기서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는 현재 남녀 불평등이라는 시대적인 반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른바 그들이 등을 기대고 있는 유림은 우선 호주제의 폐지에 대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항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호주 제도가 우리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유지하고 가족 구성원들간의 유대를 돈독히 하는 것처럼 떠들어댄다. 그러나 호주 제도의 기원이 무엇인가? 누구나 알고 있듯이 호주 제도는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나라를 강탈하면서부터 생긴 제도이다.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기 위하여 편의상 호주제라는 제도를 만들어 가계를 파악하여 세금과 징집의 수단으로 삼았다. 여기서 지주 계급이 대부분인 유림은 이에 적극적으로 찬동하여 일제의 수탈 정책에 노골적으로 협조했다.

오늘의 성주 이씨 총제공파 종중이 행하는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유림처럼 남자만이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취지로 이번의 종중 재산을 분할하려는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 아들이 있는 분이라면 이렇게 말하라. “나중에 이 아버지가 죽거든 네 누이동생에게는 한 푼도 주지 말고 네가 다 가져라.” 그리고 딸들에게 말하라. “네 할아버지의 선산과 제사는 네 사촌들에게 주마. 너는 다른 집안으로 시집갈 거니 이 아버지는 잊어버려라!”

그래도 어떤 이는 이렇게 주장할지 모른다. 어떻게 감히 여자가 남자처럼 집안을 잇느냐고. 유림은 조상에 대한 제사는 부계의 혈족에서 지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남자 혈족에게만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했나.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 고려와 심지어 조선시대 중반에 이르기까지도 조상에 대한 제사는 아들과 딸이 동등하게 지내왔다는 기록이 있다. 효와 예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마음의 충과 예의 발로에 있는 것을 진정 모르는가. 효(孝)와 예(禮). 그것은 바로 남녀 평등에서 시작된다.

오늘. 아내의 외출. 아내의 행동이 자랑스럽다. 아들과 딸 오누이에게 제 방 청소를 시키며 저녁 식사 준비를 기쁘게 준비한다. 아내를 위하여. 딸을 위하여. 아들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리고 남녀 평등한 우리 가정을 위하여!

<김형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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