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존재 인정 않는 직장

한 고비씩 넘겨 ‘최초’ 타이틀

 

삼성 공채 출신 첫 여성 임원

첫 여성 부사장 비결 뭐냐고요

“동료 내 편 만들고, 프로로 일해”

 

삼성 여성 ‘1호’ 상무·전무·부사장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최인아 대표. 그 역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삼성 여성 ‘1호’ 상무·전무·부사장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최인아 대표. 그 역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조직 내 ‘소수민족’ 여성이 살아남는법

삼성 여성 ‘1호’ 상무·전무·부사장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최인아 대표는 삼성의 ‘유리천장’을 깨트리고 사장으로 승진할 것으로 기대됐지만 2012년 스스로 물러났다. 삼성은 1993년 국내 최초 대졸 여성 공채 시대를 열었지만 오너 일가를 제외하곤 아직 여성 사장이 없다.

최 대표는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는 명카피를 지었다. ‘광고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란 닉네임도 얻었다.

이런 이력 덕에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에 관한 질문도 많이 받았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많이 달고 있어서다. 최 대표는 “사람들이 뭔가를 못할 때 능력 없어서 못한 건지, 아니면 절실하게 원했는지 먼저 돌아보라고 말한다”고 했다. 자기점검을 먼저 하라는 얘기다.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돌아보고 그 다음에 시스템을 고치려는 노력을 해야죠. 어쨌든 내 입장이 불리하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취하는 사람에 비해 더 많이 노력해야죠. 자신이 우선 중요하게 생각하고 일해야 하는데 무조건 결과만 원하는 건 잘못된 거죠.”

최 대표에게 ‘여자의 봉우리’에 대해 물었다. 그 역시 숱한 어려움을 겪고 봉우리를 넘었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존재를 부정당하는 경험도 적잖게 했다. 진급이 늦고 월급이 늦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학교 때는 여자와 남자가 같다고 배웠는데 직장에 들어가니까 웬걸, 어디가 같아요? 열등한 존재 취급을 받았어요. 예컨대 호칭도 남자는 ‘김정호씨’라고 부르면서 저는 ‘미스 최’로 불렀어요. ‘김정호’라고 부르려면 세 글자를 기억해야 되는데 여자는 3분의1만 노력하는 건가 생각도 들고…. 최인아라는 개별자보다 ‘미스’라는 이름으로 그냥 대충 묶는 거죠. 미스 김, 미스 박, 미스 최…. 하찮은 존재로 본 거죠. 제가 입사하기 몇 년 전 회사에서 대졸 여사원들을 뽑았는데 죄다 결혼하니까 한동안 채용을 중단했다가 우리가 입사했어요. 큰맘먹고 여자를 다시 뽑은 거죠. 한 4년 지나니까 저 혼자 남았어요. 이후 혼자서 다 돌파해야 했죠.”

남자동기들하고 승진이 같아진 게 입사 13년 후였다.

“결과만 보니까 저를 부러워 하죠. 어떻게 봉우리를 넘었냐고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내가 꼭 이겨내야지 싶었지만 학교에서 배운 식대로 안했어요. 배운대로 하면 ‘저를 최인아씨라고 불러주세요’ ‘커피 심부름을 하려고 입사한 게 아니예요’ 분명하게 자기 입장을 얘기했을 거예요. 당시 여자들의 입장이라는 게 마이너리티였어요. 소수민족인 거죠. 소수민족이 살아남는 길은 주변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놔선 안 됐어요. 나는 내 편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봉우리를 넘어보겠다는 오기를 가졌고 첫 번째 계단 노릇을 내가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두 번째는 프로 의식을 갖고 잘하려고 했어요. 사람들이 내가 뭐 늙었든 젊었든 흑인이든 백인이든 예쁘든 안 예쁘든 간에 나를 쓸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믿었죠.”

임원의 세계에도 분명한 성차별이 존재했다. 남성들의 정보 독점이다. 하지만 그는 끼어준다고 해도 별로 끼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것에 좌지우지되는 상태에 자신을 두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나는 클라이언트 일을 하는 거고,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제일기획은 나를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최인아 대표는 “마케팅에서 가장 경계하는 일이 쉽게 대체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며 “직장인이라면 기업에서 나 아니면 안 되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최인아 대표는 “마케팅에서 가장 경계하는 일이 쉽게 대체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며 “직장인이라면 기업에서 나 아니면 안 되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실 사진기자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되라

최 대표는 “마케팅에서 가장 경계하는 일이 쉽게 대체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며 “불행하지만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직장인이라면 기업에서 나 아니면 안 되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가 가진 고유성과 개성을 키우라는 것이다. 

그는 “직장인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되게 후한 편”이라며 “제대로 자신을 봐야 한다”고 당부했다. “자신이 100점, 90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의제기를 할 때도 상대방이 동의할만한지 짚어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턱도 없는 얘기를 하는 거죠. 반대로 이 사람이 하는 얘기는 반박할 게 별로 없다는 평가를 받아야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여성 후배들에게 각별히 어떤 점을 당부하고 싶느냐고 물었다. 

“강연 때도 느끼는데 사람들은 맨 끝의 방법론을 다 찾아요. 당장에 써먹을 수 있는 걸 찾는데 저는 그것에 연연하는 게 안타까워요. 알파고가 나오고 AI가 나오는데 인문학이 왜 융성을 하느냐? 그런 걸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기계가 인간이 하는 일의 거의 60~70%를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생각해야 될 것은 인간이 도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어떤 존재인지 물어야 하는 겁니다. 단순 작업을 기계가 할 수 있다면 나는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야죠. 그게 인문학입니다.” 선후가 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상태니 트렌드를 쫓아가는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지적이다.

“맨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데 바로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해요. 많은 사람들은 방법론을 찾아 애태우는데 리더들은 달라요. 변화의 핵심이 뭔지, 의미가 뭔지를 찾아요. 언제까지 그렇게 쫓아다닐래, 언제까지 방법론을 찾을 건데, 되묻고 싶어요.”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도 물었다. 그는 “시골에서 흙과 함께 성장하지 못하고 콘크리트 아파트숲에서 자란 아이들이 많더라”며 말문을 열었다.

“너무 깨끗하게 위생적으로 자라는 것보다 오히려 적당히 흙속에서 뒹굴고 벌레에도 물려가면서 저항력을 키워야 할 것 같아요. 개인의 힘으로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것이 갖춰진 환경에서 컸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서 어릴 때 자신이 겪은 시스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당황하거든요.” 어려운 현실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저항력과 면역력을 키우라는 말이다. 

 

제일기획 부사장을 거쳐 책방 주인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최인아 대표. ⓒ이정실 사진기자
제일기획 부사장을 거쳐 책방 주인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최인아 대표. ⓒ이정실 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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