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7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47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소녀상을 둘러싸고 소녀상 철거 반대와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난해 9월 7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47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에서 많은 참가자들이 소녀상을 둘러싸고 소녀상 철거 반대와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포켓몬고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작년 여름의 소동 때문이었다. 냉전의 섬에 갇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글로벌 시장의 ‘자유’를 ‘만끽하는’ 한반도 주민들의 현실 감각은 그 여름 잠시 뒤섞였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냉전 섬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국경을 가로지르는 ‘자유로운’ 유희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자본과 기술은 그것이 자유라는 허구적 현실을 우리에게 주입하니,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이로군!’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오히려 작년 여름, 속초 상공에 출현한 포켓몬고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냉전의 현실감각에 균열을 내었다. 포켓몬고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여름의 소동이 어떤 논의로 이어졌는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창조경제에 눈먼 사람들은 또, 한국형 포켓몬고를 개발하자며 난리를 쳤다. 창조경제의 뒤를 잇는 ‘4차 산업 혁명’ 담론 속에도 냉전 따위의 현실은 보이지 않는다. 증강현실과 냉전, 군사적 점령 같은 것을 연결해서 고민하는 것은 망상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망상을 현실로 구현한 사람들도 있다. 존 크래이그 프리만의 ‘보더 메모리얼(Border Memorial: Frontera de los Muertos)’(2015)는 바로 그런 작업이다. 보더 메모리얼은 증강현실을 이용해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에서 살해당한 수천 명의 이주 노동자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공공예술 작업이다. 사용자들은 스마트 폰을 통해 위치기반 서비스에 기록된 ‘학살’의 장소에서 ‘상실된 신체의 잔해’를 증강현실로 만날 수 있다.

보더 메모리얼의 작업에서 증강현실 기술은 매우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물질적인 영토가 국가들 사이의 점령과 지배의 대상이 되면서 영토 내에서, 혹은 국가 사이에서 무수한 희생자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장소를 점유해서 건축물이나 기념물을 세우는 통상적 기념 방식으로는 물질적 국경을 넘으려다 학살당한 사람들을 애도하는 정치적 함의를 충족하기 어렵다. 점령과 영토분쟁의 영역일 뿐인 현실의 영토는 증강현실 속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모두의 것이 된다. 이런 정치적 ‘컨버전스’를 통해 보더 메모리얼 작업에서 증강현실 기술은 영토적 지배의 패러다임에 저항하는 정치성을 획득한다. 이는 단지 ‘4차 산업혁명’의 산물이 아니고 ‘오큐파이 운동’과 같이 물질적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거하고 이를 저항의 상징적 실천으로 만든 저항 운동의 역사와 맞닿아 있다.

학살의 트라우마와 애도의 정치성을 고민해온 질문은 애도의 신체성에 대해 다양한 실험으로도 이어졌다. 여러 실험이 있지만 2013년 시작된 모뉴먼트 퀼트(Monument Quilt) 운동도 흥미로운 사례다. 모뉴먼트 퀼트는 성폭력 희생자를 위한, 희생자에 의한 쉼터이자 연대 단체다. 이 단체는 성폭력 역사를 기록하고 생존자를 기리는 차원에서 퀼트를 제작해서 역시 위치기반 서비스를 통해 가상공간에 성폭력 현장 지도를 구축하는 ‘기념’ 작업을 하고 있다. 온라인 퀼트 지도는 오프라인에서는 오큐파이 방식의 퀼트 퍼포먼스로 이어진다. 사람들이 온라인을 통해 주문해 제작한 퀼트를 미국의 여러 지방이나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설치하고 시위하는 오큐파이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가상공간과 물질적 현실을 오가는 애도의 네트워크는 최근 소수자 정치의 주요한 상징 실천이자 저항 운동의 방식이 되고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 나타난 성폭력 생존자들의 해시태그운동도 온라인 담론 공간을 일시적으로 점거하면서, 이를 통해 기존의 물질적인 제도(문학 제도, 문화제도 등)에 저항하는 오큐파이 운동의 한 사례로 자리매김될 필요가 있다.

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25년 넘게 이어온 수요집회 역시 점령당한 신체를 애도하는 저항적 오큐파이 운동의 세계적인 사례다. 수요집회 1000회를 기리면 만든 만들어진 평화비(소녀상)는 원래 기념물이었다. 그러나 소녀상 ‘설치’를 영토 분쟁으로 매도하는 공격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소녀상 설치 운동은 오큐파이 운동이 되고 있다.

퀼트는 여성의 가내수공업 노동의 산물로 취약한 여성 노동과 ‘이어붙이기’라는 노동 특성이 결합해 여성적 연대의 대표 상징이 되었다. 증강현실로 상실된 신체의 잔해를 다시 조합하는 것은 인간 신체의 취약성을 환기하면서 국경을 넘는 연대의 중요성을 환기한다. ‘소녀상’ 역시 이런 맥락에서 폭력에 노출된 신체의 취약성과 연대를 환기하는 것이다. 점령당한 신체를 애도하는 저항적인 오큐파이 운동의 지구적 사례를 볼 때, 소녀상이 영토 분쟁을 일으킨다고 보는 건 전형적인 점령자의 논리다.

증강현실이나 인터넷 네트워킹 기술은 기술 그 자체를 넘어 애도 네트워크를 구축해 저항의 비물질적 거점이 되고, 기술이 정치화되는 곳에 새로운 현실도 열린다. 소녀상과 해시태그는 변하지 않는 견고한 현실의 물질적 영토를 일시적으로 점거해 새로운 ‘세계’를 이곳에 불러들이는 상징적 거점이자 입구이다. 냉전이라는 발밑의 현실과 글로벌 테크놀로지, 소수자 정치는 한국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거점이다.

그러나 대선 후보자들이 이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뷔페 메뉴에서 접시를 고르는 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유권자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메뉴들에 불과한 것이다. 그 접시들을 입맛에 맞게 모아 우격다짐으로 내놓은 창조경제의 융합 밥상이 어떠했는지 잊었는가? 현실과 기술, 진보정치와 비즈니스를 적당히 뒤섞은 융합 메뉴는 더는 필요 없다. 저항의 역사와 연대의 네트워크를 변화하지 않는 완강한 영토에 ‘컨버전스’하자. 그게 바로 ‘이번 차’ 혁명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