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선배들에게 성희롱·성추행 피해 입었으나

오히려 회사로부터 해고·고소 당한 여성 A씨 

피해자·연대단체, 회사 측에 사과와 고소 철회 요구 

 

김린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 활동가가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김린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 활동가가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갑을관계를 이용해 디자인소호가 벌이는 약자 짓밟기를 여기서 끝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며 돌아가는 폐쇄적인 디자인업계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사건을 보고 디자인과 학생들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디자인 회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전국언론노동조합 주최로 열렸다. 직장 내 성폭력을 당한 피해여성 A(28)씨는 떨리지만 굳건한 목소리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회사 측에 진정성 있는 사과 및 보상과 고소 철회를 요구했다. 

A씨는 “지난해 5월 디자인소호에서 일하던 중 직장선배 2명으로부터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대표이사 이모씨와 이사 윤모씨는 오히려 가해자를 두둔하고 해고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이에 피해자가 부당해고 사실과 성폭력 사건을 인터넷에 폭로하자 이씨는 지난해 6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피해자를 명예훼손으로 형사고소했다. 회사의 고소 사실에 충격을 받은 피해자는 온라인에 유서를 게시하고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회사 대표는 사과는커녕 피해자를 또다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2차 형사고소했다.

지난 2일 피해여성 A씨는 명예훼손죄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에 따라 사건을 공론화하기 위해 자신과의 연대를 밝힌 단체와 함께 기자회견 자리를 마련했다. 특히 이번 기자회견은 지난해 10월 SN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이 고발된 이후, 처음으로 피해당사자와 연대단위들이 공식석상에서 피해경험을 말하고 가해자들을 규탄한 자리여서 그 의미가 깊다.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해당 업체와 성추행 가해자를 향한 규탄의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 ⓒ강푸름 기자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해당 업체와 성추행 가해자를 향한 규탄의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 ⓒ강푸름 기자

 

피해당사자 및 연대단위는 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디자인 회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피해당사자 및 연대단위는 7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디자인 회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피켓을 든 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사측이 오히려 가해자 편에 서서 또 한 번 피해자에게 폭력을 가했다”며 “디자인소호는 피해당사자가 성폭력 사건을 인터넷을 통해 공론화했다고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했다. 헌데 그것이 과연 누구의 명예인지 궁금하다”고 일갈했다. 이어 “성폭력을 가해한 사람들에게 과연 보호받아야 할 평판이 있는지 궁금하다”며 “혹 그러한 평판이 있다면 피해를 입은 여성노동자의 상처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꼬집었다. 김 위원장은 “언론노조에서는 이 문제가 완전무결하게 해결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 위원장은 “가장 문화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출판계에서 각종 야만적인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며 “성폭력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분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박세중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 지부장은 “사측에서 명예를 운운하며 피해당사자를 고소하고 대내외적으로 당사자에게 잘못을 떠넘기는 동안 당사자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며 “그 결과 피해당사자는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적 고통으로) 병원치료를 받아야 했고 생계를 이어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이어 박 지부장은 “앞으로 우리는 성폭력 혹은 부당해고라는 위험에 처해있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들과 함께 연대해 싸울 것”이라며 “이번 싸움의 목표는 피해당사자의 신체·정신·물질적인 상태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다.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끔 정책, 제도적 목소리를 모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린 여성 디자이너 정책 연구 모임 ‘WOO’ 활동가는 “지난해 10월 SNS에서 ‘#문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성폭력 피해담이 무수히 고발되면서 문화예술계 영역 내 여성들은 그동안 우리사회에 만연했던, 권력위계를 이용한 성폭력의 실태를 수면 위로 드러냈다”면서 “하지만 폭로 이후 피해자들은 거꾸로 가해자측의 고소 협박 등 직간접적 보복에 고통받고 있다”고 밝혔다.

WOO는 여성 디자이너들이 모인 연대체로, 일터와 삶의 현장에서 여성들이 온전히 자신의 역량을 펼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지난해 11월 27일 발족한 모임이다. WOO는 여성 문화예술인들의 연대를 기반으로 하며, 여성 디자이너들이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 피해를 기록하고 공론화할 수 있는 지원을 마련하고자 한다. 또 여성 디자이너들이 평등한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국 현실에 맞는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박진희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피해당사 대리인은 이날 기자회견 발언자로 나섰다. ⓒ강푸름 기자
박진희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피해당사 대리인은 이날 기자회견 발언자로 나섰다. ⓒ강푸름 기자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해당 업체와 성추행 가해자를 향한 규탄의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 ⓒ강푸름 기자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피해자를 해고·고소한 해당 업체와 성추행 가해자를 향한 규탄의 메시지를 담은 이미지. ⓒ강푸름 기자

이어 김씨는 “디자인소호 대표는 디자인 업계에서 지탄받기는커녕 최근 독일 뮌헨 디자인 위크 관련 행사에 한국 대표 연사로 초청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원으로 임용되며, 국가인권위원회 사보 디자인 용역을 수주하는 등, 성폭력을 눈감아주는 업계의 인맥 중심 권력 구조가 여전히 공고함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특히 김씨는 “모든 문화예술인에게 투쟁과 지지를 요청한다”며 “우리는 모든 억압자에 맞서 피해자의 곁을 지킬 것이다. 문화예술업계와 학계에서 성폭력이 사라지고 여성들이 온전히 권리와 존엄을 획득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이제 문화계 내 성폭력은 그것을 직접 경험한 여성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모든 여성이 공유하는 경험이 됐다. 본 사건이 비단 한 명의 피해당사자가 아닌 여성 공동의 싸움인 이유”라며 “모든 여성 문화예술인이 이 같은 승리를 거둘 때까지 디자인, 문학, 미술, 사진, 영화, 전시기획, 출판계의 9개 조직은 ‘여성문화인연합’으로 연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박진희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피해당사 대리인은 “이번 사건을 대응하면서 직장 내 성폭력이 불평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노동자가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발생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했다”며 “특히 여성일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고용관계가 불안정할수록 더욱 성폭력으로부터 취약한 위치에 놓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박 여성위원은 “피해당사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사 측에) 충실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한다”며 “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연대체들과 함께 디자인소호가 우리의 요구를 이행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특히 그는 “(회사와 가해자 측이) 하루빨리 정신을 차리고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회사 앞에서 집회와 1인시위, 온라인상에서의 규탄을 마련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원미라 전국언론노동조합 조직쟁의실 활동가의 사회로 진행된 기자회견에는 김환균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 박세중 전국언론노동조합 서울경기지역출판지부장, 김린 여성 디자이너 정책연구모임 ‘WOO’ 활동가, 박진희 전국언론노동조합 출판노조협의회 여성위원·피해당사자 대리인 등이 발언에 나섰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피해자와의 연대의사를 밝힌 단체와 개인 40여명이 참석해 피해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이들은 기자회견이 진행되는 중간 중간 눈물을 훔치며 피해 당사자에 대한 공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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