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속 여성학 ①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운동 현장을 가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송미헌 열림터 원장

김보화 울림 책임연구원 참석

“여전히 부족한 젠더감수성

문화 바꿔야 성폭력 줄어든다”

2017년 현재, 페미니즘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2030 ‘넷 페미니스트’들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만들어낸 다양한 사회적 파장은 연일 대중과 미디어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 여성운동사의 분수령을 맞이한 때에, 다양한 세대와 주체들이 서로 경험을 나누며 여성운동의 더 큰 그림을 그릴 필요도 커졌다. 지금은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와 문제의식, 철학을 공유하고,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며 함께 나아갈 때다.

여성운동 현장 탐방 프로그램 ‘현장 속 여성학’은 이런 취지에서 시작됐다. 첫 프로그램은 6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렸다. 낡고 비좁은 주택을 사무실로 쓰다가, 2015년 7월 후원금으로 새 터전을 마련했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과 가족들, 시민들의 도움으로 쌓은 벽돌 한 장, 두 장이 모여 번듯하고 아늑한 공간이 탄생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송미헌 열림터 원장, 김보화 울림 책임연구원이 여성신문 기자단을 반갑게 맞이했다. 사람들이 모인 이안젤라홀 한켠엔 화가 김숙경이 보낸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가 함께 보낸 시에는 ‘걷는다. 걷는다. 여자는 걷는다’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 건물. 설계 :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사진 박영채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 건물. 설계 :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황두진 건축사사무소. 사진 박영채

 

화가 김숙경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새 터전을 환영하는 의미로 그림 한 점을 보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화가 김숙경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새 터전을 환영하는 의미로 그림 한 점을 보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참석자들은 이날 상담소를 포함한 한국 반(反) 성폭력 운동의 역사에 대한 짧은 강연을 들은 후,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토론했다. 1991년 문을 연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지난 26년간 전국 159곳(2016)으로 늘었다. ‘사적인’, ‘중요치 않은’, ‘수치스러운’ 문제로 치부된 일들에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성폭력은 성별 권력관계에서 비롯된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알리려 노력했다. 성폭력특별법 제정, 성희롱의 법제화 등에 힘썼고, ‘성폭력생존자 말하기대회’, ‘밤길 되찾기 달빛시위’, 책·영화 제작 등을 통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치유와 자립을 도왔다. 선정적이거나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문제적 언론 보도’ 비판에도 앞장섰다.

“1990년대만 해도 ‘성폭력’이라는 말은 낯선 개념이었어요. ‘성폭력상담소란 이름이 너무 세다’며 창구의 은행원이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하기도 했었죠. 이젠 성폭력이 ‘성적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의식이 어느 정도 보편화됐습니다.” 이 소장은 “그러나 피해자를 보호한다면서 오히려 여성을 피해자화하며 주체성을 박탈하는 문제,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으로 인해 끊임없이 피해자임을 의심받는 2차 피해 문제, 성폭력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는 내버려 두고 개별 가해자만 처벌하는 문제는 여전하다”고 비판했다. 

잇따르는 성폭력 사건 관련 무고죄·명예훼손 등 ‘역고소 남발’ 사태, 법의 ‘성 편향적 합리성’에 관한 열띤 논의도 이어졌다. 상담소 관계자들은 “합리적이고 ‘대중의 상식’을 대변해야 할 법이, 남성 가해자의 시각에서 여성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다”고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운동 현장 탐방 프로그램 ‘현장 속 여성학’ 첫 프로그램은 6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렸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송미헌 열림터 원장, 김보화 울림 책임연구원과 참석자들 ⓒ여성신문
여성운동 현장 탐방 프로그램 ‘현장 속 여성학’ 첫 프로그램은 6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렸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송미헌 열림터 원장, 김보화 울림 책임연구원과 참석자들 ⓒ여성신문

차별과 폭력을 묵인하는 사회 문화와 왜곡된 젠더 인식을 바꾸려면, 일상 속에서 타인과 맺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젠더 감수성이 필요하다. “이는 학교·직장에서 1년에 몇 시간씩 성폭력 예방 의무 교육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고 송 원장과 김 연구원은 강조했다. 상담소는 대중을 위한 알기 쉬운 성폭력 개념·이슈 설명, 효과적인 인식 변화 캠페인 등에 더 많은 노력을 쏟을 계획이다. 

최근 페미니즘 열기와 더불어 상담소에 응원을 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지만, 더 많은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고 이 소장은 말했다. “‘시민 없는 시민단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대중과 소통하려 했는지 요즘 반성하고 있어요. 온라인을 활용해 상담소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널리 홍보하려 노력하려 합니다. SNS 등을 통한 후원 확대에도 힘쓸 계획이고요.” 

마지막으로 상담실, 회의실, 옥상 텃밭 등 상담소 건물을 한 바퀴 돌아본 후, 두 시간에 걸친 프로그램은 끝났다. 바쁜 일과를 쪼개어 모인 여성운동가들과 기자들은 짧지만 유의미한 토론을 벌였고, 서로를 격려했다. “잘못된 것을 그저 비판하기만 하는 데에서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나누는 운동”을 지향한다는 이 소장의 말에, 참석자들은 “서로 지지하고 협력하며 함께 나아가자”고 화답했다.

△1991년 한국성폭력상담소 개소 △1991~1993년 성폭력특별법제정추진위원회 활동 △1993~2000년 성폭력위기센터 운영 △1993~1999년 서울대조교성희롱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활동 △1994년 부설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열림터 개소 △1997~2006년 부설 성폭력문제연구소 운영 △1998~2006년 부설 성평등교육문화센터, 부설 21세기여성․미디어운동센터 운영 △2003년 제1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2004년 여악여락콘서트 △2004~2007년 부설 성폭력피해생존자자립공동체 하담 운영 △2004~2009년 밤길되찾기시위 △2006년 욕망찾기, 작은말하기 시작 2006~2007년 성폭력 조장하는 대법원 판례바꾸기 운동 △2010년 젠더감수성교육 시작 △2010년 여성가족부 공동협력사업 우수단체 선정 △2013년 부설 연구소 울림 개소 △2015년 길거리괴롭힘 소멸 프로젝트,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시작
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반성폭력 운동’입니다. 후원금은 상담소 운영과 자율적인 반성폭력 활동, 성폭력피해생존자를 위한 상담·법적 지원·치유 프로그램, 여성 관련 국가 정책과 성폭력 관련 법·제도 감시·비판·제언 활동,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문화 바꾸기 운동에 사용됩니다. 후원 방법과 계좌는 공식 홈페이지(클릭)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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