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증후군 발단은 여자 고생시키는 음식 준비

홈커밍 즐거움 누리기만 해도 명절은 기쁜 날 

 

전(煎) 부치는 날은 온 집안이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기름이 귀하던 시절 전을 부치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절이나 제사 때 혹은 잔치 때 전을 부쳐 먹었다. 기름기 부족하게 살던 시절 전은 모처럼 배에 기름기 조금이라도 충족시켜주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손이 많이 가는 건 둘째 문제였다. 전 부치는 냄새만으로도 이미 배부른 느낌이었다. 제사상에 전은 빠질 수 없었다. 그러니 차례를 지내는 추석이건 새해 맞아 조상께 절하는 설이건 이틀 내내 전 냄새가 진동했다. 제사상에 오를 게 아니더라도 모처럼 모인 가족이나 찾아온 손님에게 나눠줄 만큼 넉넉하게 전을 부쳤다.

지금은 음식 모자라서 전전긍긍하는 시대는 이미 아니다. 늘 기름진 음식 먹고 돈 들여 그 기름기 빼는 게 일상사가 된 시대다. 그런데도 명절이면 으레 전 부치느라 전전긍긍이다. 물론 음식도 전통이다. 그러나 그런 전통이라는 것도 법률에 정해진 게 아니라 살아온 방식을 반영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좋은 전통은 당연히 따르는 게 옳다. 그 전통이 마련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공이 들었을지 생각하면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해왔으니까 지켜야 한다는 건 뭔가 헛헛하다.

먹을 만큼 혹은 제사상에 올릴 만큼의 전만 부치고 음식 마련도 거기에 맞추면 된다. 못 먹어서 슬픈 시대를 사는 것도 아니다. 명절은 흩어진 가족이 모여 조상께 살아온 한 해를 고하고 감사하며 밀린 이야기 나누고 서로 덕담하며 축복하는 날이다. 언제나 명절 때만 되면 귀성 귀향 행렬로 고속도로가 거대한 주차장이 되는 건 제수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흩어진 가족 모처럼 모두 모이는, 그것도 한 집만 그러는 게 아니라 모든 집이 다 모이는 날이다. 내 가족뿐 아니라 옆집 앞집 친척집 가족 모두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살가운 날이다.

그러나 지금의 명절은 오며가며 힘겨운 교통대란에 시달리고 기껏 도착해서는 필요한 용량 이상의 음식을 장만하느라 전투(?)의 연속이다. 그저 제사상에 올릴 만큼, 함께 모인 가족이 나눠 먹을 만큼만 준비하면 된다.

끝까지 먹지도 않아서 몇 날을 명절 음식 처리하느라 고생하다 끝내는 남기거나 지겨워 물리는 낭비를 반복할 까닭이 없다. 준비하는 것도 남은 음식 계속 내는 일도 버리는 일도 온통 여자에게만 떠넘기는 것도 허튼 일이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는 명절 때 필요한 음식을 미리 준비하셨다. 며느리들 모이면 대충 마무리만 시키고 모처럼 모였으니 밖으로 나가 놀라고 떠밀기도 하셨다. 나중에 당신 편찮으셔서 그 일도 못하실 때는 형제들끼리 몫을 나눠 일종의 파트럭 파티(potluck party)처럼 명절을 지냈다. 이번 설에 지난 가을 결혼한 큰조카 내외가 왔다. 누이는 아예 조카며느리를 부엌에 얼씬도 못하게 했다. 나는 차 키를 내주며 아들들과 조카들을 모두 밖으로 내몰았다. 볼링도 즐기고 겨울 밤바다도 즐기다 밤늦게 돌아온 녀석들은 표정이 밝았다. 명절은 그런 홈커밍데이면 족하다.

명절증후군의 양태는 다양하지만 그 발단은 넘치는 음식 준비다. 물론 여자들의 몫으로 제한한다. 적당히 먹을 만큼만 준비하되 각자가 분담해 먹으면 된다. 남자들도 그 며칠 ‘왕자놀이’ 즐겨봐야 헛일이다. 그 배로 대가(?)를 치른다. 누가 더 일하느냐의 문제를 따지는 것도 유치하다. 마련해야 할 음식의 종류와 양부터 줄여도 가벼워진다. 홈커밍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명절은 즐겁다. 먹지도 않을 음식 마련하는 일보다 잘 먹는 음식 몇 가지 준비하고 상에도 올려 절하되 조상님들 제대로 기억하고 기리면 된다. 생각을 바꾸면 삶의 방식이 바뀐다. 그걸 못하면 정작 의미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연례행사가 될 뿐이다.

그깟 전 좀 부친다고 명절증후군 운운하는 건 정성이 모자라고 쉽고 편하게 사는 데에 익숙해서 그렇다고 타박할 게 아니다. 명절 전(前)부터 전(煎) 부칠 생각에 전전(煎煎)긍긍하는 것부터 내려놓자. 부담스럽고 짜증나는 명절이라면 그게 무슨 명절이겠는가. 설날 제사상에 한라봉, 케익 올린다고 조상님 능멸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음식도 드셔보시라 조금만 관대해져도 될 일이다. 뜻을 잃지 않고 세속에 맞춰 조금은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능히 명절의 의미와 기쁨은 지켜질 수 있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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