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한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이별한 뒤 다시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죽기 전 여성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동거인이라는 이유로 남자를 풀어줬다.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살해)의 가해자는 단지 한 개인이 아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데이트폭력, 가정폭력으로 여성이 죽지만, 여전히 세상은 고요하다.

반복되는 뉴스 속 남성은 여러 모습을 하고 있다. 헤어진 애인, 남편, 취객, 창창한 OO지망생, 정신질환자. 반면 여성의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의 꿈, 절망, 기쁨, 고민, 삶은 사라진 채 죽음만 전시된다. 가끔 OO녀로 호명되기도 한다. 작년 여름, 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한 뒤 유기된 여성에게는 ‘가방녀’라는 수식이 붙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사건 묘사에 피해자에 대한 애도는 없다. 자극적인 서사는 곳곳으로 소비되고, 예비 피해자인 여성을 향한 몸단속으로 연결된다. 누군가의 죽음이 남긴 흔적이 네 몸을 조심하라는 조언으로 흐르는 세상은 섬뜩하다. 일상적 폭력에 익숙해진 우리는 자신을 단속해왔다.

2016년 5월, 도심의 노래방 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남성에게 살해당했다. 미디어는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경찰은 조현병 환자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평소처럼 여성에게 몸단속하라는 조언으로 흐를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시민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나는 오늘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내일은? 앞으로는?” “피해자의 꿈을 물어봐 주세요” “살女주세요”

사건 이후 한동안 바닥 깊이 감정이 내려앉았던 나는 새벽마다 추모 현장의 포스트잇과 증언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누군가의 글을 보고, 나는 내가 매 순간 ‘그 날’을 지나쳐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에서부터 연인, 학교, 직장, 길거리, 공간과 관계에서 몸단속을 요구받고, 피해를 입막음 당하면서 아슬아슬하게 ‘그 날’을 통과해왔다는 것을. 오늘 나는 우연히 살아남아 있었다.

그날 이후 삶이 바뀌었다고, 전처럼 살 수 없다며 페미니즘을 공부하겠다고 카페에 찾아오는 여성이 늘었다. 나 역시 그랬다. ‘전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책에 손이 갔다. 습관처럼 길든 생각과 행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적인 혁명이 필요했다. 더구나 나를 둘러싼 세계가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느꼈기에 더욱 독서에 몰입했다.

한때 나는 독서가 단지 개인의 지적 욕망을 채우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행위는 아닌지 회의감을 느꼈다. 하지만 타인의 자리를 상상하고 연대할 힘은 단지 광장에 모여서 하나의 구호를 외치는 것만으로 생기지 않았다. 자아를 견고하게 쌓던 기존의 독서습관에서 벗어나, 내가 알던 세계를 부수고 시선을 여는 읽기가 시작됐다. 책은 내 경험을 초과하는 타자의 세계로 나를 인도해주었다.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했다. 그 점에서 독서는 애도와 닮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그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상태가 애도이기 때문이다. 얼굴 없는 죽음 앞에서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살아남은 우리는 읽어야 한다. 나는 읽고 쓰고 연결되는 소란스러운 독서를 꿈꾼다. 돌이킬 수 없는 인식에 이르고, 돌아갈 수 없는 문을 넘으면서 절망을 앞에 두고 함께 연대하는 게 내가 바라는 독서다.

첫 책으로 『강남역 10번 출구, 1004개의 포스트잇』을 골랐다. 이 책에는 강남역 여성살인사건을 통과하며 함께 애도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이기 위해서 꼭 들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책이다. 쓰기, 읽기, 살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책은 말한다. “너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다.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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