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학생들이 지난해 10월 1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ECC관 이삼봉홀 앞에서 최순실 딸 정유라씨의 특혜 의혹과 관련해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이화여대 학생들이 지난해 10월 17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ECC관 이삼봉홀 앞에서 최순실 딸 정유라씨의 특혜 의혹과 관련해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2016년, 뉴 페미니스트는 미러링(mirroring)으로 무장하고 전면에 등장했다. 여성멸시를 남성멸시로, 남성우월주의를 여성우월주의로 반사해 돌려주는 이들의 전략은 통쾌하고 강렬했다. 남성들이 여성 성기를 멸시했다면 여성들은 남성 성기를 조롱했다. 남성우월주의가 여성을 차별했다면 여성우월주의는 남성을 비천한 것으로 만들었다.

방금 지옥에서 돌아온 뉴 페미니스트들에게 여성우월주의는 젠더 패러디 이상이었다. 이들은 남성적인 것이 비천한 것인 한, 이제 세상은 우월한 여성성, 여성우월주의를 통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성우월주의는 그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여성’ 대통령과 ‘여성’ 리더십의 무능력과 부패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여성 대통령의 통치는 남성 멸시는커녕 여성 멸시의 확장을 가져오는 듯했다. 이화여대의 여성주의 리더십은 여성 우월성을 신장시키기는커녕 학생들의 기회와 권리를 박탈했다. 그렇다면 왜 ‘여성’의 권력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권력화된 것은 어떤 ‘여성’이었나?

먼저 ‘여성’ 대통령을 살펴보자. 대통령 박근혜는 남성주체의 환상에 따른 ‘여성’이었다. 그녀는 아버지 박정희의 딸이자, 조실부모한 가엾은 피해자이자, 국가와 결혼한 희생적 아내였다. 여기서 ‘여성’ 대통령은 주체도 행위자도 능력자도 아니다. 그녀는 수첩이 있어야 겨우 말할 수 있는 공주이며, 그녀의 유일한 능력은 외모 가꾸기일 뿐이다. 그녀는 피해자이자 희생양이기에 어떤 책임으로부터도 면제돼 있다. 여기서 ‘여성’은 텅 빈 기호이며 이 기호를 채우는 의미는 아버지로부터 온다. ‘여성’ 대통령은 형식이며 이 형식이 실현하는 통치의 내용은 가부장적 권력 카르텔이다. 결론적으로 ‘여성’ 대통령이 실패한 이유는 그것이 가부장적 남성의 여성성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성’ 대통령은 남성의 대상일 뿐이며, 따라서 여성우월주의는 처음부터 기대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화여대의 ‘여성’ 리더십은 어땠는가? 이화여대는 기존의 남성 리더십을 비판하면서 배려와 소통의 여성 리더십을 실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여성’은 적어도 텅 빈 기호는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 리더십은 배려와 소통의 우월한 여성 능력을 전제로 했다. 그러나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속에서 여성 리더십이 부패하게 됐다는 데 있었다.

미래라이프 대학 신설의 과정에서 학교당국은 학생들과의 민주적으로 소통하지 않았으며, 본관 농성을 시작한 학생들은 배려가 아닌 경찰폭력에 맞닥뜨려야 했다. 더 높은 권력에 선을 대고, 더 많은 프로젝트를 따와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태계에서 소통과 배려의 여성 리더십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성 리더십은 결국 학생들의 여성우월성을 신장시키기보다 이를 저해하는 부패와 한 패를 이루었다.

이렇듯 가부장적 남성 대상으로서의 ‘여성’,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매몰된 ‘여성’의 권력화는 여성우월주의를 증명하기는커녕 그 실패를 앞당겼다. 어차피 ‘여성’도 ‘남성’과 매한가지니 이제 여성우월주의 따위는 포기하자는 말을 하려고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이왕 시작했으면 제대로 하자고 말하고 싶다. 진짜 여성우월주의를 원한다면 ‘여성적인 것’이 무엇인지, 그 우월성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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