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촬영 현장에서 일어난 배우 간 성추행

재판부 “감정 과몰입으로 있을 수 있는 일”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 긴급포럼 개최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16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주제로 연 긴급포럼에서 토론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변지은 기자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16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주제로 연 긴급포럼에서 토론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변지은 기자

여배우 A씨는 최근 한 영화촬영 현장에서 가정폭력을 당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중 남배우 B씨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 A씨에 따르면 B씨는 A씨의 속옷을 찢고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신체접촉을 했다. 이에 A씨는 B씨를 고소했으나 재판부에선 “감정 과몰입으로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B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와 씨네21은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긴급포럼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열고 A씨 사례와 같은 영화 촬영 현장의 여배우 성폭행 문제에 관해 토론했다.

정하경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에 따르면 A씨는 영화 장르가 15세 관람가의 휴먼드라마라는 내용 설명을 듣고 해당 영화의 출연을 결심했다. 하지만 실제 영화 촬영 수위는 피해자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랐다.

정 소장에 따르면 A씨는 “촬영 전 합의 내용은 내가 벽 쪽에 있고 B씨는 내 뒤에서 신음소리나 표정 연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강간 상황을 암시하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실제 촬영에 들어가자 B씨가 내 상의 양쪽을 잡아 찢은 뒤 속옷까지 찢고 바지 안으로 손을 넣어 추행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사건 이후 B씨를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B씨에게 5년을 구형했지만 1심 법원이 “B씨는 감독의 지시에 따라 배역에 몰입한 것이고 이는 ‘업무상 행위’이므로 성폭력이 성립하지 않는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정 소장은 법원의 ‘업무상 행위’라는 판결에 대해 “만약 감독이 A씨와 B씨 둘 다와 함께 ‘강간 연기’에 대해 사전 논의하고 리허설을 거친 뒤 해당 장면을 촬영했다면 이는 업무상 행위였겠지만 이번 경우 A씨는 해당 장면이 ‘강간 연기’인 줄 모르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실제 증거로 제출된 영화 메이킹 필름 녹취록을 살펴보면 촬영 직전 감독이 B씨만 따로 불러 해당 장면에 대해 “그냥 옷을 확 찢어버려라 미친놈처럼”이라고 연기를 지시하는 대목이 나온다.

정 소장은 “이는 남성 감독과 남성 배우가 피해자를 속이고 몰래카메라를 찍은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번 재판에선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감독의 행위도 성폭력을 교사·방조한 행위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어 “감독이 ‘강간 연기’를 지시했더라도 B씨는 당연히 촬영 전 A씨와 소통하고 합의했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배우를 향한 ‘남성카르텔’이 형성된 끔찍한 상황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16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주제로 연 긴급포럼에서 정하경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이 발언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16일 서울 마포구 가톨릭청년회관에서 ‘그건 연기가 아니라 성폭력입니다’를 주제로 연 긴급포럼에서 정하경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장이 발언하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영화계 내 성폭력이 반복되는 이유는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카르텔’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손 연구원은 “영화계 남성카르텔은 여성 배우를 직업인으로 생각하지 않고 무시하기 때문에 강간 장면을 여배우와 합의하지 않고 실제 강간을 해야 강간 장면이 ‘진정성’있게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손 연구원은 “이번 사건에서는 가해자로 남배우 B씨만 거론됐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강간 연기를 지시하는 감독과 범죄 현장을 묵인하는 남성 스태프, 돈을 대주는 제작사까지 모두에게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언희 영화감독 역시 “남배우 B씨뿐 아니라 남성 영화감독에게도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며 “제작자와 감독이 이번 재판에서 빠졌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치 꼬리자르기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또 사전에 배우와 합의되지 않은 수위 높은 노출 연기를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을 감독 개인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문제”라며 “여배우들은 감독의 이러한 강요로부터 법적으로 어떤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조 위원장도 “영화 현장에서 성범죄가 발생해도 처벌을 받는 건 남성 배우나 스태프들이고 제작사와 감독은 쏙 빠져나간다”며 “범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배우 김꽃비 역시 “영화계 내 성폭력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법무법인 신세계로 조인섭 변호사는 “1심 판결문에 ‘한국 영화계 70년 역사상 추행이라고 이야기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말이 나왔다”며 “이는 실제 영화계에 70년 동안 추행이 없었다기보다는 A씨 외에도 수많은 여배우가 연기라는 미명 하에 성적 자기결정권이 인정되지 않은 일이 많았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씨네21 이예지 기자는 “영화는 합의와 통제 하에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상대배우의 동의를 얻지 않은 연기는 연기가 아니”라며 “예컨대 살인자 역할을 맡은 배우가 연기하다가 실제로 살인하면 그것을 연기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편 이날 긴급포럼에는 최근 자신의 동의 없이 상반신 노출 장면을 유포한 이수성 영화감독을 고소한 배우 곽현화씨도 참석했다.

곽씨는 “‘너 벗을 수 있어? 오 그럼 넌 배우!’와 같은 성적 기행을 예술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영화계에 만연해있다”며 “하지만 이 인식에 반론을 제기하는 여배우는 ‘까다로운 애’로 분류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실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싫었지만 혹시 나와 비슷한 억울한 상황에 있는 분이 계신다면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게 됐다”고 말해 지지와 연대의 박수 세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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