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유럽 귀족을 묘사한 『위험한 관계』와 이를 리메이크한 『스캔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몸치장이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인 몸치장조차 스스로 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스스로 하지 않는 절대권력, 제왕적 무능이야말로 절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몸종이 모든 것을 시중드는 몸치장은 귀족적 지배의 연장이고 자기 신체를 스스로 치장하는 근대적 사생활과 다르다. 18세기에서 한참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박근혜 체제에 대한 논의는 서로 모순된 두 접근 방식 사이에서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무능함과 유아성을 강조하고 조롱할 때 주로 여성성이 동원된다면, 제왕적 통치 스타일에 대해서는 아버지의 영향, 청산되지 못한 유신 잔재로 논의된다. 이런 협소한 분석으로는 제왕적 무능함이라는 지배 방식의 독특성을 해석할 수 없다.

또 제왕적 무능함이라는 통치 구조와 신분제적인 지배는 박근혜라는 개인의 통치 스타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제왕적 지배는 이른바 재벌들의 ‘갑질’이나 사회에 만연한 권력남용, 인사 전횡, 교수들의 제자 착취 등에서도 나타난다. 세습 정치, 재벌 2세, 조직마다 무성한 ‘진골, 성골, 육두품’ 타령도 너무나 전형적이다. 수저 계급론은 이런 세습 신분제 사회에 대한 세대적 표현이기도 하다. 신분 상승이 가능했던 교육마저 무너진 후 신분 상승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런 지배방식은 국민, 직원, 가족, 혹은 인민, 노동자, 사생활 같은 영역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킨다. 제왕적 지배를 위해 모두를 시중드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회인 것이다. 제왕적 지배 체제에서 가족이 사생활도, 친밀성의 영역도 아닌 권력 승계와 투쟁의 장인 것은 전형적이다. 여성으로서 박근혜는 여기서 흥미로운 역할을 한다. 즉 제왕적 지배는 항상 남성적 지배와 동일시됐다. 박근혜 체제에서 여성성은 제왕적 지배를 은폐하는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박근혜 체제 비판에서 여성성 역시 제왕적 지배를 회피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여성성을 동원한 조롱과 풍자는 절대 권력에 맞서는 대중적 공포를 회피하는 기제로 작용한 점이 있다. 적어도 여성성에 대한 조롱은 공포를 쾌락으로 전도하는 역할을 했다. 절대 권력에 맞서는 공포는 여성성에 대한 지배를 통해 완화되고 제왕적 지배의 남성성은 부정되기보다 다시 도입된다.

촛불 혁명의 국면이 풍자의 쾌락과 차기 대권 주자에 대한 기대와 예측으로 이행하는 것도 어떤 점에서는 이런 회피의 연장이다. 풍자의 쾌락은 노예상태에서 이탈하는 일시적 ‘해방감’을 주며 민주주의의 다종한 역량을 선거로 절대화하는 것 또한 주권자의 환상에 가깝다. 집요하게 반복되는 여성성에 대한 몰두는 혐오나 조롱을 위한 탐닉에 가깝다. 체제 비판의 도구로서 여성성에 탐닉하는 일은 단지 여성혐오를 퍼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성성을 조롱하는 쾌락은 노예화를 연장하지만 은폐하는 매우 ‘효율적인’ 지배의 쾌락인 것이다. 제왕적 무능이 지배하고 그 지배 아래에 있으면서 조롱과 혐오의 방식으로 저항을 대체하는 것은 노예적 예속의 반복에 가깝다. 이 반복을 끊는 것이 제왕적 지배의 노예 상태를 끝장내는 일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 끝장을 통해서만 새 활로를 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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