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역사는 비체들의 역사

남성성과 여성성 횡단하며

경계 허물고 공고한 젠더체계에 균열

 

정치철학자 이현재
정치철학자 이현재
최근 등장한 우리 사회의 메갈리아 등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그들은 ‘용서하지 않기’(zero tolerance) 입장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어떤 형태의 여성혐오나 비하 발언에도 비판의 날을 세웠다. 너무 지나치다는 반발도 있었고 혹자는 또 다른 형태의 모방범죄라고까지 비판했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알게 모르게 저질렀던 여성대상화와 비하가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했다. 여성혐오에 둔감했던 시위에서도 이 문제는 다시 제기됐다. 그 정도면 메갈리아가 할 노릇을 다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러나 정치철학자 이현재는 『여성혐오 그 후』에서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에게 “수고했어” 하고 퉁 치지 않는 듯하다. 그는 혼돈, 비판 그리고 변화를 이끄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이 미래의 페미니스트 이론과 자원이 되기 위한 논리적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점에서 그를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여성들의 아우성 ‘소리’를 논리와 설명체계를 갖춘 ‘말’로 다시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을 ‘비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들은 기존의 여성주의 이론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이념이나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체(abject)라고 명명한다. 즉 그들을 ‘규정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통일된 존재 방식을 갖지도 않으며 남성과의 경쟁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의 전략을 수행한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비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언어 안에 그녀들을 가두려 했다.” 이현재는 말한다.

그는 메갈리아 미러링의 예를 가져온다. 미러링은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오히려 남성과 여성의 위계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메갈리아에서 사용한 과감한 언어는 기존의 여성성을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메갈리아가 등장하자 “어떻게 여자가 성기를 언급하고 욕도 할 수 있을까? 여자인척 하는 남자다”라는 반응도 나타난다. 그러나 이현재는 이들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횡단하며 경계를 허문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공고한 젠더체계에 구멍을 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페미니즘의 역사가 비체들의 역사였음을 보여준다.

이현재는 이 시대에 왜 여성에 대한 이유 없는 혐오가 더욱 확산됐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여혐 현상을 막연하게 가부장제 때문이라고 뭉뚱그려 말하기보다는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과 시대정신을 이야기한다. 1997년 IMF, 신자유주의, 금융자본의 지배, 돈으로 돈을 벌고, 노동을 천시여기는 풍토 속에서 삶이 척박해진 남성들, 불공정한 사회속에서 루저로 남겨진 남성들은 재분배 정의를 지향하기보다 왜 여성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을 선택하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왜곡된 인정투쟁의 허점을 조목조목 따진다.

이현재는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을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소수자(minority)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을 비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특정한 정체성을 공유한 여성들이 아니며, 설명되는 순간 그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즉 비체들의 모임은 타자들의 모임이며, 이들 간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묻고 있다. 지배적 젠더체계에 속하지 못하고 주위를 유령처럼 맴돌았던 비체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각기 다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분절된 타자들이 어떻게 연대를 구성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전하고 있다.

이현재는 기존에 존재하는 연대의 정서를 살펴본다. 예를 들어 동정심(sympathy)은 그 기반에 불평등을 전제하기 때문에 자신의 우월적 정체성이 훼손되는 순간 유효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 동감(empathy)은 동정심보다는 낫다고 해도 결국 타자와 내가 같다는 전제 아래서 타자의 상황을 상상으로 재구성하는 것인데, 이것 역시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해라는 점에서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타자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거울보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현재는 공감(co-feeling)을 제안한다. 이것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타자와 내가 상호 의존되고 연결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감은 서로에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관계, 즉 상호감응 하는 관계이다.

이현재는 꼰대 노릇 제대로 해보겠다며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상호 공감의 정치학을 전략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역시 꼰대답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치열한 논리와 이론 그리고 질문은 서로 다른 우리들이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보여주고 있다. 책을 덮고 나서 마음에 다가오는 든든한 따뜻함은 뭘까? 다시 돌아가 읽어야 할 책이다. 꼼꼼하게 그의 질문을 다시 정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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