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다산다난했던 병신년 한 해가 이제 저물고 있다. 마치 롤러코스트를 타듯 새해의 시작에는 늘 품게 되는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고, 분노로 이어지다 또 다른 색깔의 희망을 품게 되는 일년이 아니었나 싶다.

4월 13일,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7%라는 역대 최고의 여성의원이 배출되고 재선, 3선 이상 여성의원들이 여럿 탄생하면서 여성정책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한 한 해였다. 그러나 5월에 강남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은 그간의 여성정책의 성취를 한 순간에 무너뜨릴만한,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구조적 성차별 문제를 직시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건대 이 사건이 지닌 충격의 크기만큼 우리에게 준 큰 교훈 또한 의미가 깊다.

우선 이 사건은 인적이 드문 외딴 곳이 아닌 가장 도시화된 지역, 그리고 많은 사람이 오가는 일상공간에서 벌어진 살해사건이라는 점에서 그 어떤 정책 의제보다 여성들의 의식화를 불러일으킨 계기가 됐다. 또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간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혐오라는 단어가 2016년 새로이 회자되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성차별 문제, 반여성편견 문제가 전면에 가시화됐다. 언어 규정이 현실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두 번째는 이를 계기로 일반 여성들의 적극적 말하기가 시작됐다. 강남역 사건은 그간 많은 여성들이 자신이 경험한 차별에 대해 개인 문제로 생각하거나 남성들이 이야기하는 서사에 막혀 침묵해왔던 행동 방식을 버리고, 폭력의 심각성과 그것이 여성차별적인 사회구조와 연결돼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성들의 말하기는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사회 각 분야 여러 집단의 폭력성을 가시화하는 계기가 됐다. 대학가 교수집단의 문제에서 나아가 그동안 단톡방에서 은밀히 오간 동기들에 대한 성희롱, 성폭력 고발로 나타났고, 이는 문단내 성희롱, 성폭력 사건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말하기로 이어졌다. 예술을 가장한 권력을 가진 저자집단과 가장 약자 집단인 출판계 여성 종사자들간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여성희롱과 폭력의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또 영화 제작현장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의 문제가 관련 종사자들의 입을 통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최근 이루어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의 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로 영화계 경력을 포기했다고 밝힌 여성이 15%를 점유한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 그 예다. 이러한 말하기와 적극적 행동은 광범위하게 일상을 점유한 온라인 소통방식에 힘입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이제 그동안 관객으로 방관자의 태도를 취하던 남성들 중 이러한 여성들의 말하기에 적극 동참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글을 통해 또는 공중파 TV프로그램을 통해 여성차별의 문제가 남성에 대한 구속이나 불편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여성혐오가 개인적 층위의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사회구조적 층위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남성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남성들이 등장했고, 이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이들의 등장과 행보를 기존의 부정적인 맨스플레인(mansplain)의 방식을 전복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과욕일까?

2010년 뉴욕타임즈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하고, 2014년에는 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에 등재된 맨스플레인(mansplain)은 여성은 무지한 반면, 남자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남성들이 여성들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일컬은 것이다. 레베카 솔닛은 맨스플레인이 많은 상황에서 여성을 침묵하게끔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여성을 향한 폭력에 대한 남성들의 침묵을 깨고 새로운 연결과 동참을 이끄는 새로운 방식의 맨스플레인이 새해에는 등장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남성들이 여성들과 함께 양성평등 의제를 편안히 이야기하고 여성주의 강연을 듣는 것이 자연스러워지는 환경을 여러 방식으로 조성할 필요가 있다. 2016년이 그동안 침묵하던 여성들이 말하기 시작했던 한 해였다면, 이제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는 한 해로 2017년을 기대해본다. 그리하여 “성평등은 모두의 진보”라고 천명한 유엔의 의제가 일상에서 자연스런 모습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 새해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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