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지촌 여성 자활지원단체 새움터 신영숙 대표

내년 1월 20일 미군 기지촌 위안부 소송 1심 판결

박정희 정부 건드리는 소송 가능하냐는 우려도

미군 위안부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도 시급 

 

‘한국 내 기지촌 미군 위안부 국가손해배상청구소송’의 1심 판결이 오는 1월 20일 선고된다. 변호인단 32명이 소송을 주도하고 있긴 하지만, 오랜 준비 작업부터 원고 122명의 법원 인솔까지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고 있는 조력자들이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새움터의 신영숙(46) 대표는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활동가로 재판을 지원하고 있다. 새움터는 기지촌 여성 자활 지원단체이며, 신 대표는 1995년 기지촌 봉사활동으로 위안부 여성들과 인연을 맺은 후 2004년 새움터에서 활동가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2012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 2014년 6월 소송이 시작된 후 미군 위안부의 피해 사실이 공론화되긴 했지만 그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껴 여전히 대중 앞에 나서기를 두려워 한다. 이들의 재판 이야기를 신 대표를 통해 전해 들었다.

 

새움터 신영숙 대표 ⓒ이정실 사진기자
새움터 신영숙 대표 ⓒ이정실 사진기자

-11월 18일 마지막 변론을 마쳤다. 재판이 길어질 것을 예상하셨나.

“소송 시작 전 변호사 설명회를 열었을 때 한 3년 걸릴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자 원고(미군 위안부)들이 “이러다 우리 다 죽으면 어떡하느냐”고 하셨다. 실제로 두 분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마지막 날 ‘시간이 진짜 짧다’고들 하셨다. 원고들의 피해 사실을 최대한 전달하기 위해 주력했지만 122명의 가슴 속에 못 다한 얘기는 얼마나 더 많겠나.

소송 목적은 해방 후 국가 정책에 따라 기지촌 여성들이 존재했고 위안부로 동원돼 피해받았던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소송가액 1인당 1000만원도 피해 내용에 비하면 의미없는 금액 아닌가. 또 이번 소송을 몰랐던 미군 위안부들도 소송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할머니들을 소개해 달라.

“대개 20~40년씩 기지촌 생활을 하셨다. 주로 60~70세인데 다들 가족이 없이 평택, 동두천, 파주, 군산 등 기지촌 주변에 여전히 거주하신다. 떠나고 싶어도 거처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 어쩔 수 없다. 병원 진료 기록을 연구한 결과 연령에 비해 건강 상태가 매우 나쁜 것으로 나왔다. 성매매를 강요당하면서 건강을 돌봤을 리가 없고 약물중독, 알코올중독, 흡연, 심각한 청력 손상 등 그곳 생활에서 얻은 질병도 많다. 정신적, 심리적 상처는 가늠이 안 된다.”

-지금에서야 소송을 시작한 이유는?

“소송 얘기는 2000년대 초부터 나오긴 했다. 그러나 피해자는 많은데 재판에서 싸우기 위해 입증할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여론도 두려웠다. 그 사이 피해 경험을 한 번도 자유롭게 토해내지 못한 채 한 분씩 돌아가시기 시작했다. 남은 분들은 생을 마감하는 동료들을 지켜보며 더 이상 묵인하고 기다리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2012년에 한 분이 큰 용기를 갖고 나서서 피해 내용을 상세하게 증언하셨다. 그 말씀을 토대로 전국의 성병관리소를 찾아다니고 지금도 정부기관에 찾아가 수십년 간 쌓인 방대한 자료를 훑으며 증거를 수집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정권 출범 초기여서 박정희 정부의 문제를 건드리는 이 소송이 가능하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에 박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로 책무를 했기 때문에 지금 그 책임을 져야할 의무가 있고, 설득하기에 시기적절하다고 봤다.”

-재판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나?

“위안부라는 용어를 정부가 사용했고, 성매매가 자발적이지 않고 인신매매와 사기로 기지촌에 유입됐다. 또 기지촌 사업이 지방정부가 아닌 중앙정부의 업무였으며 피해자들이 생존해있고 피해사실 인지 시점으로는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승소를 기대한다. 그러나 원고들은 이기든 지든 무조건 끝까지 가겠다고 하셨다. 미국에서도 소송을 해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도 승소 못하지 않았나.”

-원고들이 강제로 받았던 성병검사와 치료가 피해를 입증하는 핵심 증거가 됐다.

“국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강제로 성병검사를 하면서 ‘건강관리’라고 계속 주입했다. 보건소 한곳에서 400~500명이 3시간 만에 수치스럽게 산부인과 검사를 받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검사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토벌해서 성병관리소에 감금하고 페니실린부터 주사했다. 고통으로 쇼크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제 성병관리가 미군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국가시책이었고 이용만 당했다는 걸 명확히 알게 되셨다.”

 

1972년 당시 기지촌 정책 관련 정부 문건 ⓒ새움터
1972년 당시 기지촌 정책 관련 정부 문건 ⓒ새움터

-피해 사실이 사회에 잘 전해졌다고 보는가?

“원고들과 모니터링을 열심히 하는데 여론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적 연대감도 생긴 것 같다. 가난한 가정의 10대 중반 소녀들이 일자리를 찾다가 사기나 인신매매 당했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이뤄진 것 같다. 정말 자발적이라면 스스로 기지촌에 들어가더라도 스스로 나올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포주에게 빚으로 묶이고 성매매 당하고 대가도 받지 못했다. 도망치면 붙잡히고 구타당했다.”

-이같은 인식 변화가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쳤나?

“예전에는 기지촌 얘기가 나오면 무조건 두려워하고 회피하려 하셨다. 워낙 오랜 기간 낙인과 편견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또 고통 받으면서도 자신이 왜 이런 피해를 당하는지 혼자서는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막연한 공포심과 불안감에 짓눌렸다. 지금은 많이 당당해지셨다. 자신감이 생기면서 두려움이 줄어들었음을 느낀다. 소송 과정에서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국가가 주도한 폭력이고 인권침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소송에 참여한 자신들에 대해 언론이 어떻게 말하는지 직접 보고 분석하겠다고 적극적이시다. 재판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아도 매번 힘든 몸으로 서울중앙지법에 참석하셨다.”

-미군 위안부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는 어떤 입장인가.

“군 위안부 문제 전반의 해결과 재발 방지에 관심이 많다. 같은 피해를 경험한 다른 나라와 연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잘 해결되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신다. 또 지금도 미군 부대 주변 업소에서 한국인 대신 일하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의 피해를 많이 걱정하신다. 국적에 상관없이 피해를 막고 보호해야 한다. 모두 군사주의에 의한 성매매 피해다.”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가.

“많은 원고들이 암이나 치매같은 중증 질환으로 더욱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새움터 활동가들은 남은 생을 잘 마감할 수 있도록 어떻게 지원할 수 있을지 고민이 매우 크다. 기지촌 위안부를 지원하는 특별법 제정 도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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