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본에 없는 노출 강요

허락 없이 키스신 촬영도

 

페미니즘 지지·연대 늘면서

배우들의 ‘말하기’에 힘 실려

 

여성 배우들이 영화계 내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발언을 지지하고 이들과 연대하는 관객층이 늘면서 그동안 묻혔던 배우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고 있다. ⓒ디자인=박규영
여성 배우들이 영화계 내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발언을 지지하고 이들과 연대하는 관객층이 늘면서 그동안 묻혔던 배우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고 있다. ⓒ디자인=박규영

‘현장의 꽃’으로 불리며 배우로서의 전문성보다는 ‘아름다운 육체’로 존재해야 하는 여배우. 성차별적인 영화계에서 왜곡된 편견을 딛고 살아남아야 하는 여배우는 그야말로 ‘극한 직업’이다. 최근 벌어진 ‘여배우’ 논쟁은 한국에서 여성 배우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많은 성차별과 성폭력, 유리천장을 뚫어야 하는 일인지 새삼 드러낸 사건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것은 여성 배우들이 영화계 내 여성 인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배우들의 발언을 지지하고 이들과 연대하는 관객층이 늘면서 그동안 묻혔던 배우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고 있다.

“‘여배우’는 ‘여성혐오’적 단어다.” 신인 배우 이주영씨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쓴 이 글로 “메갈(메갈리안)이냐” “피해망상이다” “신인 주제에 나댄다” 등 조롱과 수천 개의 악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여배우는 ‘남배우’라는 말을 쓰지 않는 다는 점에서 분명 성차별적이다. ‘여의사’, ‘여검사’, ‘여류 작가’처럼 ‘남성’을 기준이자 표준으로 삼는 명칭이다. 배우라는 말에 ‘남성’이라는 전제가 깔렸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여배우는 여성혐오적 표현이 맞다.

일부에선 ‘성차별적 표현은 맞지만, 여성혐오는 아니다’라며 맨스플레인(mansplain·여성을 가르치려는 남성) 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PC)으로 표현하는 게 옳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여성혐오의 어원인 미소지니(misogyny)는 여성을 미워하고 증오한다는 뜻만을 포함하지 않는다. ‘여자를 현실에서 소외시킨 모든 태도와 방법과 의식’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사회적 배제와 차별, 비하, 폭력, 성적 대상화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여성혐오는 ‘PC’를 포괄한다고도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가 주연을 맡은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속 성폭행 장면이 슈나이더의 동의 없이 촬영됐다는 사실이 44년 만에 알려졌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그 장면이 남자주인공 말론 브랜도와 몰래 짜고 이뤄졌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다. 베르톨루치 감독은 배우가 모욕감을 ‘실제 느끼기’를 바랐다고 전해진다. ‘리얼리티’를 위해서라면 여성 배우의 인권 따윈 상관 없다는 태도다.

한국 영화계에서도 여성 배우에게 신체 노출을 강요하거나 배우의 허락 없이 키스 장면을 촬영하는 사례는 쭉 있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연출한 장건재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김새벽은 상대 배우 이와세 료가 입을 맞추는지 모르고 촬영에 임했다”면서 “새벽씨는 몰랐으니 당황스러워했다. 그 느낌이 영화에 잘 담겼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배우 이상아씨도 영화 ‘길소뜸’ 촬영 당시 임권택 감독이 전라 노출을 강요해 촬영했다고 털어놨다. 당시 이씨는 고작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이런 상황엔 실감 나는 연기와 좋은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늘 변명처럼 뒤따른다. 매우 폭력적이며 배우의 능력과 전문성을 무시한 이 같은 ‘몰카적’ 방식는 주로 신인이나 여성 배우에게만 가해진다. 경력 10년 이상 된 중견 배우들도 영화계 성차별에 혀를 내두른다. 배우 엄지원씨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현장의 꽃은 여배우라고 한다. 여배우는 왜 꽃이 되어야 하나? 여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다”고 적었다.

여성이 주인공이나 감독을 맡은 작품도 찾아보기 힘들다.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계에서 다양한 조직폭력배는 존재하지만, 스크린 속 여성 캐릭터는 모성만 강조되거나,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만 비친다. 또는 남자주인공의 서사를 뒷받침하는 보조자로서만 등장할 뿐이다. 여성 배우들은 물론, 영화인이라는 꿈을 키우던 스태프들도 여성혐오로 물든 영화판을 견디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하지만 꿈과 생계 때문에 침묵을 강요받던 여성들도 이제 불편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배우 김꽃비씨는 페미니스트 영화, 영상인들의 연대를 위해 페이스북에 개설한 그룹 페이지 ‘찍는 페미’는 개설했다.

영화평론가 황미요조씨는 배우들의 이 같은 ‘말하기’가 이들의 발언을 지지하고 연대하려는 관객들이 있기에 가시화됐다고 분석했다. 최근 ‘여배우’라는 표현과 관련한 잡음 혹은 논쟁 자체가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황미요조씨는 “배우들의 ‘여배우’ 관련 발언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과거엔 논란은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했다”며 “최근 1~2년 사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늘고 학습하는 관객이 증가하면서 배우들의 발언이 받아들여졌고, 배우들도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배우 김윤석씨의 ‘무릎 담요 성희롱 사건’은 최근 영화계의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김씨는 지난 1일 온라인으로 진행된 영화 홍보 인터뷰에서 공약 질문을 받자 치마를 입고 있던 여성 배우가 덮고 있는 무릎 담요를 내려주겠다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그는 “1~2년 전만 해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도 사과 없이 사건이 흐지부지됐지만, 이번엔 바로 현장에서 다른 남자 배우가 ‘죄송하다’고 제지했고, 김윤석씨가 공개 사과도 했다”면서 “이제 여성 인권, 페미니즘에 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여성들의 눈치를 본다는 점은 놀라운 변화”라고 짚었다. 이를 통해 대중문화 영역 중 상대적으로 남성성이 강했던 주류 한국 영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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