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민족 앞에 서다-경북의 여성독립운동가] 

1931년 여성운동을 이끌던 근우회는 무너졌고, 일제의 반인륜적인 군국주의 행보는 날로 거세졌다. 일제의 피 묻은 칼날은 한반도를 넘어 대륙으로 향했다. 동아시아는 전쟁의 참화 속에 빠져들었고, 한국은 전쟁을 위한 기지로 변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운동계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운동 이후 스스로 여성단체를 만들고 여성 계몽과 해방을 부르짖었던 여성운동은 더 이상 합법적 틀 안에서 유지하기 힘들었고, 큰 효과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1920년대 여성계를 이끌던 인물 가운데 더러는 생활 속에 묻혔고, 더러는 친일의 길로 돌아섰다.

그러나 모두가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여성들은 농민·노동·학생들 속에서 투쟁을 펼쳐나갔다. 혁명적 노동·농민조합 운동과 반제·반전 운동이 주류를 이뤘다. 1931년 경북 안동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안동콤그룹에도 여성부가 있었고, 전금옥·박금숙과 같은 여성들이 책임자로 활동했다.

특히 여성노동자가 늘어나면서 노동운동 대열에 뛰어든 여성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여성노동자의 권익향상을 촉구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그들 가운데 경북에 뿌리를 둔 10대 소녀들이 있었다. 이효정과 그의 고모 이병희가 바로 그들이다.

 

이효정
이효정

 

이효정 피체기사
이효정 피체기사

이효정은 외갓집이 있는 봉화에서, 이병희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조부 때까지 대대로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에 살았다. 부포마을은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나온 곳이다. 광무황제의 상기가 끝나는 날 함께 자결한 이명우·권성 부부를 비롯해, 1926년 6․10만세를 선창했던 이선호가 이 마을 출신이다.

이효정의 가족들도 대거 항일투쟁에 나섰다. 증조부 이규락, 종조부 이동하와 이경식, 숙부 이병기, 고모 이병희 등이 그들이다. 거기에는 남녀 구별이 없었다. 2009년 3․1절 기념 다큐멘터리에서 “어릴 때부터 그런 분위기에서 자라서 (독립운동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는 이효정의 말에서 집안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효정은 조부 손에 이끌려 신학문을 닦았다. 그는 시집 『회상』에서 “지독한 양반 우리 할아버지, 개화를 하신 걸까. 노망이 나신 걸까. 댕기머리 치렁한 손녀 앞세우고, 신식학교 입학시키러 가셨다네”라고 회고했다. 이런 조부 덕분에 이효정은 18세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2학년 때인 1929년,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이효정도 만세를 부르다가 고초를 겪었다. 이듬해는 친구들과 백지동맹투쟁에 나섰다가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졸업 후 1933년 9월에는 종연방적 경성제사공장 여성직공파업을 주도했다. 그리고 결국 1935년 11월 검거돼 1년이 넘는 옥고를 치렀다.

 

이병희
이병희

이병희 또한 10대 중반의 어린나이에 노동 현장에서 투쟁했다. 이효정의 고모였지만 나이는 다섯 살이나 더 어렸다. 그는 “일제가 운영하던 공장은 초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여성들만 직공으로 받았는데, 파업을 통한 여공들의 저항은 대단했다”고 뒷날 회고했다. 결국 이병희도 1936년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열아홉이었다. 1939년 4월 출옥한 이병희는 이듬해 다시 베이징으로 망명한 후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옥중에서의 고통도 그 뜻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2012년 이병희는 9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그는 “독립운동은 남성들의 역할도 컸지만 여성들이 기여한 부분도 작지 않으니 언젠가는 사람들이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알아 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또 “요즘 사람들은 당장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역사를 제대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역사를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깨어 있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5회에 걸친 ‘경북의 여성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마치며, 이병희 지사의 말씀에서 특별히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분명한 것은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다.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큰 빚을 지고 있다. 또 한편 무엇인가는 극복해야 할 과제로 우리에게 남겨졌다. 그 과제를 인식하고 잘 풀어 가는 것이야말로 그 누군가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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