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디자이너 이리자(8)
한복디자이너 이리자(8)
  • 안혜령 편집위원
  • 승인 2017.10.11 12:18
  • 수정 2017-10-11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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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박인숙이하고 둘이 어느 영화 시사회를 갔다가 체육선생님과 맞닥뜨렸다. 물론 선생님이 들어오시는 걸 보고는 얼른 화장실로 갔는데, 영화가 시작하길래 살짝 나왔다가 그만 붙잡히고 말았다. 그때 나는 중대장이었고 인숙이는 대대장이었는데, 그런 모범생들이 그런 델 가다니 표본으로 정학을 해야 한다고 해서 삼일 정학을 맞았다. 집에서는 몰랐다. 아마 학교가 쉰다든지 하며 내가 무슨 핑계를 댔을 것이다. 둘이 집에서 튀밥 튀어 놓고 어머니가 해주시는 맛있는 음식 먹어가며 공부를 했다. 공부 잘하는 친구하고 공부만 열심히 하


니까 어머니가 속아넘어가셨던 것 같다.





인숙이하고 얼마나 친했냐 하면, 학교에서 가사 시간에 수예를 하면 인숙이 것은 항상 내가 다 만들어줬다. 그러면 인숙이는 항상 거의 1백점에 가깝고 나는 칠팔십점밖에 못 받았다. 가사 선생님이 보시기에 인숙이는 공부를 잘하니까 으레 수예도 잘할 줄 아신 것 같고, 나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리 잘해도 어디서 만들어 온 줄 아시는 것 같았다.





극장갔다 정학맞고 영어웅변대회, 성악콩쿨등도 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여고 시절에 내가 이런저런 재주가 꽤 있었던 것같다. 영어를 잘해서 영어 웅변대회에도 나갔고, 노래를 잘해서 매번콩쿨에도 참가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영 음성이 변했지만 옛날에는 노래를 퍽 잘했다. 그러니 대전여고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대전여고 14회인데 선후배 가릴것 없이 아, 그 멋쟁이 언니, 또는 그 멋쟁이 걔, 이렇게들 알았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날 집안에 혼인이 있어서 식구가 다 그 친척집에 가기로 했다. 아버지는 해소기가 약간 있긴 하셨지만 건강하신 분이었다. 해소기가 있다고는 해도 대개 의사들이 당신 약은 안 잡수시듯 당신도 약이라곤 별로 드시지 않고 지내셨다.





그런데 그 날 아침에 아버지는 어째 아침을 잘 안 잡수셨고 몸이 불편하신 듯했다. 약국은 오전부터 많은 손님들이 예약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조금 편찮으신 증세를 보이자 어머니도 나서지를 못하시고는, 너나 어서 빨리 가라, 결혼식에 먼저 가거라 하시는 것이었다.





집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우리 집 앞에 난 철길을 걸어 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머리를 딱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뒤가 쭈뼛하며 머리카락이 서는 것 같더니만 갑자기 아, 아버지, 이런 생각이 났다. 그래서 뒤를 돌아다보니까 올케 언니가 아가씨, 아가씨 부르며 막 쫓아오고 있는 중이었다. 아버지가 지금 운명하시려고 한다 그러면서.





그 때 가 11시경이나 됐을까, 집으로 막 뛰어갔다. 그러나 이미, 내가 머리가 쭈뼛하며 섰을 때,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아이구, 하시더니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대시고는 그대로 눈을 감으셨단다. 심장마비 같다고도 했지만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





글쎄, 그때는 철이 다 났을 때인데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나 나나 거의 모든 의욕을 다 잃었다. 나는 나대로 아버지 사랑을 너무 많이 받으며 자랐고,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렇게 의좋았던 지아비였던지라 졸지에 그렇게 떠나보내고 나니 허탈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약국을 다 정리하셨다. 약제사니 모든 식솔들이 다 떠났고, 약장도 다 팔았다. 단 아버지가 보시던 <동의보감>이니 하는 좋은 책들과 아버지가 손수 쓰신 약 비방 문서니하는 것들은 내가 다 챙겼다. 생활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고향에 논도 좀 있었고, 아버지가 약국을 오래 하셨기 때문이었다. 집이 커서 하숙을 치려도 얼마든지 칠 수 있었다.





원래 나는 아버지 원에 따라 의과대학을 가려고 했다. 산부인과 전공까지 세워놓았던 터였다. 대전에는 의과대학이 없었으니 천상 서울로 올라갈 생각까지 굳혀 놓았었다.





당시 대전여고에는 실력있는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고, 그 덕택에 의대와 약대를 참 많이 갔다. 연세대학교에 계셨던 유학수 교수께서 우리 화학 선생이셨고, 수학 선생님은 한기룡 씨라고 경기여고에서 교감 선생님까지 하셨던 분이시다. 또 나는 직접 배우지 않았지만 황혜성씨도 그무렵 우리 학교에 계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영 공부가 하기 싫어져 3학년때는 실제로 별로 공부를 안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나를 서울로 보내려고 들지 않으셨다. 외로우셔서 혼자 못 계시고 나를 자꾸 의지하려고 하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과 비통함을 안으로 삭이셔야 했을 게다. 할아버지때문이었다. 당신 앞에서 자식이 돌아갔으니, 그것도 갑자기, 그런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어머니가 할아버지 앞에서 비통한 표정을 짓거나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못봤다. 몰래 우시기야 했지만.








그 당시 대전에는 충남대학교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직 졸업생이 없는 신생 대학에다가 영문과, 국문과, 법과밖에 없었다. 일류만 좋아하는 내 눈에는 학교같아 뵈지를 않았다. 그래 그만 입학 시험을 안봤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그냥 있으면 어쩌겠는가. 안 되겠다 싶어 영문과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





그 무렵 재미있는 추억이, 내가 육군부대 장교들을 가르쳤다. 일종의 야학으로, 영어를 가르친 것이다. 특별히 회화를 잘한 것도 아닌데 고등학교 때 영어를 잘했던 실력으로 문법 따위를 가르쳤다. 그때전쟁 뒤라 장교들 중에는 대학을 다니다 군에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을 위한 야학이었는데, 한 일년 선생 노릇을 했다.





그때도 그렇게 멋을 냈다. 한창 ‘빨간 구두 아가씨’란 노래가 유행할 때였는데, 빨간 구두를 신고, 내가 만든 비로도 치마저고리를입고, 여름이면 또 모시 치마저고리를 해서 입고 다녔다. 하여간 나는 모양 내는 데 청춘을 다 보낸 것 같다.





그런 중에 하루는 대학교에서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영화 구경을 갔다. 대전극장에서 하는 ‘춘희’였는데, 막 가니까 영화가 끝나고 있었다. 다음 상영은 오후에나 한다고 해서 어쩌나 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탁탁 쳤다. 돌아보니 웬 남자가 서서는 나보고 충남대학생이냐, 몇학년이냐 하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얼굴이빨개지면서 자기 친척 여동생 용순이며 박인숙이를 아느냐는 것이었다. 용순이는 이대 가정과를 들어갔고, 인숙이는 대전여고를 1등으로나와서 연세대학교 정외과를 갔고, 나중에 미스코리아 대회에까지 나갔다. 내 친구들인데요, 누구세요, 하자 그 남자는 자기가 용순이 오빠라는 것이었다. 옛날에, 중학교 3학년 때 본 그 거지같았던 남자말이다.





예전의 인상이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참 반갑고 좋았다. 새로보니 얼굴도 뽀얗고 옷도 단정하고 멋있었다. 뒤에 들은 말로는 남편은 그때 나를 보니 코도 오똑하고 예쁘더란다. 뒤에서 보고는 은근히 반해 어깨를 친 것이었다.





그 때 남편은 서울법대를 막 졸업하고 대전에 고시공부하러 내려온참이었다. 그래 놓고는 부끄러운지 그냥 도망을 가버리는 것이었다. 냘隙밗하고 났는데, 영문과의 조교가 어떤 남자가 가지고 왔노라고 하며 나한테 편지를 갔다 주었다. 수업 시간에 조남숙이하고 둘이 연애 편지 같다 하면서 뜯어보니 영어로 새카맣게 가득 써놨는데 어떻게 철학적인 단어들을 써서 어렵던지 해석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걸 집에 들고 와서 사전을 찾아가면서 읽었다. 그러나 주소도 없고 답장은 쓸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영문학회의 밤인가 하는 게 열렸다. 그동안 그가 학교에 몇번 오긴 했지만 나는 그저 먼 빛으로만 봤을 뿐이었다. 그 밤에 내가 ‘The Cloudy’라는 영시를 낭독하고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독창하게 되어 있었다. 그는 친구를 한 명 데리고 왔는데, 지금 대법관이신 신정철씨다. 신정철씨가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을 그가 반강제로 끌고 온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가 보는 앞에서 나는 영시도 낭독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순간 내 감정이 어땠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나도 그가 싫지 않던 터라 아마도 좀 떨리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뒤로 그는 드러내 놓고 열심히 나를 따라다녔다.





나중에 보니까 그는 집으로 어머니까지 찾아가 뵈었다. 사실 그 무렵에 여기저기서 내게 혼인말이 들어오고 있긴 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도 안 계신데 어머니 살아 계실 때, 또 돈도 좀 가지고계실 때 딸 하나 있는 것 여의고 싶으셨나 보다. 두말없이 결혼을 하라고 하셨다. 게다가 하루는 어머니가 꿈을 꾸셨는데, 호랑이가 입을딱 벌리고 우리 어머니 방으로 들어오는데, 내 사진을 물고 들어오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평생 큰 고생 안 하고 사신 분이라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둔감하셨다. 갓 대학을 졸업했고 변변한 직장은커녕 고시 공부한다는 남자가 무슨 경제적인 능력이 있겠는가. 뭘 믿고 딸을 맡기겠는가.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는 일체 걱정을 놓고 계셨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먹고 살 일 같은 것은 머리 속에 전혀 없었으니 참 우리 어머니나 나나 그런 점에서는 철이 덜 든 여자들이었던 셈이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 혼인을 시댁에서는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능력 없음’이었다. 남편은 형제가 넷이었는데, 누님과 형님은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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