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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이 웃는다 심청이가 웃는다

시인이자 소설가 김승희씨가 5년만에 시집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민음사, 5500원)을 출간했다. 그간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 속의 생> 등의 시집과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 등을 통해 여성의 억압적 현실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며 여성주의적 글쓰기를 실천해 온 김씨는 이번 시집에서는 한층 심화된 문제의식을 선보인다. 여성 시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던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제국주의에 의한 세계화가 제3세계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천착하며 탈식민주의적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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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시인은 이 같은 글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연히 ‘운디드 니’라는 곳에 갔던 적이 있다. 인디언 학살 장소로 유명한 곳이었다. ‘다친 무릎’이라. 그 이름이 오래 잊히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의 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기에 타자들의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IMF와 같은 국가적 재난이 왔고 신자유주의 자본이 세계를 사냥하러 다니는 이런 전지구적 시스템 안에서는 얼마든지 또다른 종류의 ‘다친 무릎’이 무한정 확대재생산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 시대, 이 시스템 안의 모두를 하위주체로, 타자-여성으로, 유색인종-흑인으로, 수동태 문장으로, 대문자 주인의 말이 기입되기를 기다리는 한없이 온순한 빈 공백으로 등록시키고 있다.”

김승희 시인의 신작은 우리들 일상 속에 공고히 자리잡고 있는 남성/여성, 주체/타자, 권력/약자, 다수/소수, 제국/변방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부음// 이상준(골드라인 통상 대표), 오희용(국제 가정의학 원장), 손희준(남한 방송국), 김문수(동서대학 교수) 씨 빙모상 = 4일 오후 삼성 서울 병원. 발인 6일 오전 5시. // 누군가 실종되었음이 분명하다// 다섯 명씩이나!// … // 남근 신의 가족 로망스 이야기’(‘한국식 실종사’ 부분) 흔히 접하게 되는 부음 광고에서 시인은 부음의 주체는 철저히 소외시킨 채 그를 둘러싼 ‘남성’들만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이러한 가부장적 관습을 비판한다. 관습의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다친 무릎’인 것이다.

시인의 눈에는 ‘사랑’ 역시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거나 ‘푸른 교황이 그려진 오천 달러면 어떤 나타샤도 데려올 수 있’는 것이 시인이 파악한 ‘사랑’의 실체다. 그 사랑은 여성을 철저히 타자화시키는 것으로, ‘언제부터인가 나는 일인칭이 하나의 명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화 홍련이요 심청이요 옥봉이요 오필리어요 (원 이렇게 물에 빠져 죽은 여자들이 많어), 숙향이요 향단이요 팥쥐요 장쇠 엄마’들은 4인칭의 바닷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여성에게 ‘다친 무릎’이 어디 이뿐일까. ‘금빛 유방을 보란 듯이 반도의 하늘에 걸어놓은 맥도날드’ 역시 ‘내 식민지의 허기’를 어쩌지 못한다. ‘아메리카의 남근’, ‘마이클 이병’, ‘코카콜라’, ‘메이드 인 저팬’도 ‘어머니를 문 밖에 그렇게 오래 세워놓’는다.

이토록 비참한 현실이지만 시인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우리더러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자기를 섬기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일상’에서 ‘ㄹ’을 빼버리고 ‘남자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남자가 되고 아이는 왕이 되’는 이상을 품어보는 시인은 끝내 ‘빗자루를 타고 달려가’며 ‘웃음’을 웃는다.

최이 부자 기자 bjchoi@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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