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색 코스모스가 피었다!기상이변일까? 아니면 가격파괴, 상식파

괴를 지향하는 시대적 흐름일까?

비로도를 연상시키는 여섯개의 빨간색 꽃잎을 가진 코스모스. 가을

에 피어야할 코스모스가 맙소사, 32도가 넘는 땡볕속에 피어 있다.섬

세한 초록잎 줄기와 함께 바람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내 가

슴속에 한줄기 ‘서늘한 낭만’이 스쳐간다. 마치 소나기처럼 시속 1

백km로 내려와 꽂히는 낭만은 한없이 매혹적이다. 비현실적이기도 하

고, 초현실적이기도 한 빗살무늬의 느낌.현실이 녹슨 파이프더미처럼

팍팍하면 팍팍할수록, 현실이 장마철 이부자리처럼 눅눅하면 눅눅할

수록, 낭만은 우리의 현실을 이스트처럼 고혹적으로 부풀려 주기도

하고, 슈베르트의 자장가처럼 달콤하게 잠재워주기도 한다.

그래서 낭만의 주성분은 보드라운 핑크빛 당분과 찰싹 달라붙는 밀

착형 환상이 아닐까?“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일생 낭만의 시초이다.

”라고 말했던 이는 오스카 와일드. 이 말은 곧,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남도 사랑할 수 있고, 더불어 인생을 사랑할 수 있다

는 말이다. 4계절 중 유난히도 여름을 띨띨하게 생각하는 내게 난데

없이 피어난 코스모스는 마치 낭만의 의상, 빨간색 비로도를 입고 찾

아온 손님처럼 웬지 경이롭다. 그래서 난 생각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이런 기발함, 이런 엉뚱함이 어디 또 없을까?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뜻밖의 행복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며칠전 ‘현대정유’에 가서 강의를 했을 때 그곳에서 만난 박

과장.그가 어쩌면 이즈음 내가 만난 사람들중에서 여름 코스모스처

럼 산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도 이미 60이후의 삶을

추상화가 아니라 구상화로 확실하게 그려놓고 있었다. 집은 서울, 직

장은 충남 대산.주말부부인 그는 나와 함께 서울로 오게 되었다. 비

가 내리는 서해안을 따라 5시간 30분동안 여행하면서 그의 폴 스토리

를 들었다. 결혼 전에서부터 아내를 만난 이후, 그리고 두딸과 행복

한 현재까지.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딸 뒷바라지에 하나뿐인 집

을 팔아 전세로 옮기고도 ‘룰룰랄랄’ 콧노래 부르며 산다는 그. 노

후걱정을 하는 아내에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 이담에 이름없는 어느 시골 성당의 사무장이 되어 허드렛일

도맡아 하면서 살자. 나는 땡땡땡, 종루에 올라가서 종을 치고, 당신

은 싸릿문 앞에서 사람들 손잡아 이끌면서, 행복하게 살자.”고. 그

는 자기들 노후준비보다는 딸들의 재능을 키워주는 것이 훨씬 더 우

선순위라며 아들없어서 섭섭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이상하

다고 한다.“시집ㅂ가면 남의 식구될 딸한테 집까지 팔아 투자할 필

요가 있냐?”는 친척들에게 그는 반문해서 물었다고 한다.

“딸들이 주는 기쁨과 보람, 세상에 어느 아들에게서 이런 행복을 느

끼는 부모가 있는지 ‘대회’라도 열어 내기해보자.”고.‘여자는 태

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던 시몬느 보봐르의 명언이

재확인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언덕길에 피어있는 작은 풀꽃을 보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니가 제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어도 너의

생명은 나의 생명과 똑같이 소중하다.그의 생명철학은 자녀교육에서

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니가 내 딸이기에 소중한 것에 앞서, 니가 한 생명체이기에 소중한

것. 게다가 내 딸이기까지 하니 더 소중한 것”이라는 그의 진솔한

마음. 5시간 30분동안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며 우리는 아쉽게 헤어

졌다. 아마도 앞으로 그를 다시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그

러나 그와같은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 살고 있다는 생각은 저 여름

땡볕속에 피어난 코스모스를 바라보듯 웬지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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