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제의 틀이 강한 아시아권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일은 아웃사이더의 길을 자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여성학을 인생의 과업으로 부여잡고 살기를 작정한 젊은 여성학자들, 그들이 말하는 여성학자로서의 삶을 육성으로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와 한국여성연구원 주최로 지난 17일부터 21일까지 이대 국제교육관에서 열린 국제 워크숍 ‘아시아 여성학 2000’의 첫날 행사 ‘아시아의 젊은 여성학자’가 바로 그것.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대만, 인도 등 아시아 8개국에서 모인 젊은 여성학자 30여명은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면서 맛보는 쓴맛, 단맛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아니타 놀스(인도)는 “여성학을 하게 되면서 가족들과 질긴 싸움부터 시작해야 했다”면서 “가부장적 분위기에 젖어 있는 가족들은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끔찍스러워했다”고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는 페미니즘이 결국 긴 싸움을 이겨낼 힘을 주었다고 고백하면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큰 기쁨을 얻는다”고 말했다. 피야루디 카이야폰(태국)은 “진보적인 영역에서조차 페미니즘 이슈들은 계급 불평등, 권력과 경제적 불평등 같은 주제에 비해 여전히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는 현실이 힘겹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학자들의 고백은 가파른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대에서 여성학을 연구하고 있는 박혜경씨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진보적이고 목적의식적인 남성들의 모습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다”면서 “그때는 남성들보다 여성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어려웠다”고 말했다. 왜곡된 이분법적 성구분에서 그 역시 자유롭지 못했다는 고백인 셈이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그가 움켜쥐었던 가장 큰 고민이 ‘왜 나는 여성들을 이해하고 존경할 수 없는가’였다는 대목은, 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시사한다.

서구적 해석으로부터 벗어나 아시아적 풍토에 맞는 여성학을 발전시켜 가려는 취지로 마련된 이번 행사에서 차세대 여성학자들의 이같은 당당한 자기고백이야말로 아시아 여성학의 밝은 미래를 점치게 하는 좋은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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