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농민 우뚝 서는 날 위해 최선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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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꿈이 비행사였던 편정옥(49) 한국여성농업인중앙연합회(이하 한여농) 회장은 비행기 조종 대신 트랙터 운전만 20년을 넘게 하고 있는 농부가 되었다. 서울에서 전국여성대회가 있던 날 그를 만났을 때 여전히 검게 탄 건강한 얼굴이었지만 팔은 깁스를 하고 있었다. 트랙터를 몰다 다친 거라고 했다. 그러나 여성농사형제들의 현실을 들려주는 그의 목소리와 눈빛에서는 한 쪽 팔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고 그역시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잠자고 있는 여성농민을 깨워야 한다”는 목소리를 누구보다 강하게 내는 편정옥 회장. 그는 변변한 학력을 갖고 있지 않다. 정규교육은 초등학교 졸. 지난 1995년 강원대 최고경영자과정을 마칠 때까지 그는 먹고살기 바빴던 20대 때부터 야학으로 고등학교를 마쳤다. 강원도 일대 사회교육기관은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배움의 욕구를 채워나가는 열정을 보였다.

자연히 “조금만 집에서 뒷받침이 되었다면...”이란 아쉬움을 표현하게도 생겼다. 그는 고향인 충남 보령을 떠나 서울에서 사무보조로 직장생활을 시작해 간호보조, 염색공장 공원, 택시기사 경험까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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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단체가 연합해 열린 농민대회에서 쌀수입 반대, 농가부채 탕감을 외치고 있는 편정옥 회장(왼쪽)과‘농민은 흉년이 들어도 울고 풍년이 들면 가격이 떨어져 운다’는 편 회장은 그래도 농사를 지으면 마음이 풍요로워진다고 말한다.(오른쪽)

편 회장은 82년 강원도 양구군 새마을 부녀회장을 시작으로 현재는 농림부에서 맡고 있는 위원직만도 5개나 된다.

“그냥 주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98년 여성특별위원회가 만들어지면서 6개 부처에 여성정책담당관을 배치했지만 어디에도 여성농민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움직임은 없었다. 농림부에 줄기차게 요구한 끝에 여성정책자문회의를 두게 했다”

이런 편 회장의 열정은 농림부 내 다른 농업정책 관련 위원회에 여성의 자리를 작게나마 챙길 수 있게 했다. 40여개 단체로 구성된 전국농민연합은 아예 여성을 끼워주지도 않았다. 열심히 두드린 끝에 이제는 편 회장을 공동대표로 ‘끼워’주었다.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조차 농민 몫이 없어 여성농민위원회 구성을 요청하고 있는 중이며, 각 정당을 향해서도 소외된 여성농민에게 눈길을 돌릴 것을 호소하고 다닌다. 올해 2월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내 여성농민위원회를 구성하게 하여 농민분과위원장을 맡고 있다.

“여성농민지원법을 국회에 청원 중”이라는 편 회장은 “지금까지 주장만 했다면 이제는 내용을 담아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편 회장은 15년 동안 부녀회장 일을 하면서 농촌여성 현실에 눈뜨게 된다.

그러나 “할 수 있다. 자기 삶의 주인이 돼라”고 외치는 편 회장의 목소리에 다들 무반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족계획사업이 한창이던 70년대 농촌여성들은 변변한 산후조리조차 못해도 계속해서 아이를 낳아야 했고 집안 일도 하고 농사도 지어야 했다. 시어른 수발은 물론 당연히 했다. 농업인구의 52%가 여성이었지만 자기지분을 챙기는 여성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남편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사 이혼이라도 할라치면 모두 빈손으로 나와야 했다.

출산수당이나 출산휴가는 꿈도 못 꿨다. 제도적으로도 막혀 있었다.

“농사꾼은 직업인이 아닌 자영업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혜택을 받지 못한다” 고 편 회장은 지적했다.

더구나 출산을 해도 대신 일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이 낳고 하루 이틀만에 밭일을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마을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신속한 해결이 힘든 지경이었다.

편 회장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남편의 동의만 얻어낸 채 시댁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 아이를 끝으로 단산했다. 1만7천 평의 땅은 편 회장의 명의로 바꿨다. 물론 남편 몫의 땅도 따로 있었다. 거기서 나오는 수익에 대해서는 일체 간섭하지 않았다. 그는 95년도에 진상전통한과 대표라는 직함을 추가했다. 순전히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해서였다.

“농번기가 끝나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무의미하게 기나긴 겨울을 보낸다. 한과공장을 차리면 부업으로도 짭짤한 수익을 올릴 수도 있고, 또 경제력이 생기면 자신감과 당당함이 생길 것이라는 판단에서 시작했다.”

96년 한여농 발족, 여성농민 힘모아

이 정도까지 하니까 여성농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친 김에 전국의 여성농민들을 모아 여성의 자리를 찾고 목소리를 내도록 해야겠다는 의지는 96년 한여농을 창립하기에 이른다.

한여농은“합리적인 농업경영, 여성농업인 권익확보 및 지위 향상”을 설립 목적으로 내걸고 충북, 충남, 경남, 경기, 전북, 강원연합회를 결성 5만 명으로 시작해 지금은 시군연합회 104곳, 도연합회 8곳, 서울의 중앙회에 12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 대표적인 농민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 대목에서 편 회장은 무명의 설움을 털어놓는다. 국민의 먹거리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해오지만 유명 스타단체에만 집중된 채 항상 농민단체는 소비자나 시민사회단체에 가려져 있는 것이 불만이다.

이제는 차츰 여성농민 처우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것에 편 회장은 매우 고무되어 있다. 일단 산후조리를 하는 여성들을 위해 농가도우미 제도를 마련한 것을 비롯, 5개 시군에 시범마을을 지정, 전문직업인으로서 출산수당을 하루 1만2천5백원씩 받게 된 것이다.

“문제는 출산하는 여성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곧 농촌 인구의 고령화를 반증하는 것이다. 작은 학교는 모두 통폐합해 일찍부터 대도시로 유학을 가기 때문에 농촌인구의 평균 연령은 40∼50대이다. 그러니 농가도우미를 쓰라고는 하지만 정작 도우미 역할을 할 인력이 없다.”

한 때 농업협동조합에 정식 조합원으로 가입한 여성은 없었다. 남편만 가입하면 되었다. 이것을 바꿔놓았지만 일부 단위조합에서나 정식가입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또 복수가입을 통과시켜 부부가 함께 가입하도록 했놨더니 아버지와 아들이 가입하는 경우도 있더란다.

그래서 편 회장은 또 하나의 꿈을 꾸고 있다. 최초 여성 농협조합장이 되는 것이다.

박정 희경 기자 chkyung@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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