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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 사이에 ‘새참계절’이 있다.

그것을 ‘가울’이라고 한다.

나는 가울 속의 만추의 풍경, 그 쓸쓸함과 눈부심을 만끽하기 위해

얼마전 남한산성엘 갔다.

한계령처럼 굽이굽이 올라가면 가을의 전설같은 안개가 성(城)을 싸

안고 있는 그 곳.

마침 점심때가 되었기에 우리 일행은 작년에 갔었던 음식점이 좋았

다며 그곳을 찾아갔다.

고대광실처럼 높다랗게, 커다랗게 지어올린 ‘신한국형 음식점’들

사이에 절대 기죽지 않고 함초롬하게 존재하고 있던 아주 자그마한

토속음식집.

초가지붕과 창호지문이 고향친구를 만난듯 아주 정겨웠다.

그러나 우리가 찾아간 그곳엔 믿고싶지 않은 현실만 존재하고 있었

다.

떨어져 나간 문짝, 무너져내린 초가지붕... 주인이 버리고 간 그 집

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듯 했다.

이 시대 실종된 갱제를 남한산성에서까지 확인해야 하다니!

햐, 이거 초가지붕이 아니라 억장이 무너지네?

우리는 불과 1년사이에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 집, 이미 추억의 골

짜기속으로 휩쓸려 내려가버린 그 집을 그리워하면서 다른집으로 발

길을 돌렸다.

동동주잔을 부딪치면서 우리가 애도해마지 않은 건 그 빈 터에 두

고갔던 우리들의 마음.

우리나라는 왜 이다지도 뭐가 잘 없어지고 잘 생겨나는가?

도깨비방망이처럼 나와라, 뚝딱! 사라져라, 뚝딱!

...얼마전 해외토픽을 보니 영국 총리관저 문지기의 정년퇴임소식이

있었다.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문여닫기를 무려 3백만번씩이나 한 밥 조든.

별명은 ‘문지기 밥’. ‘밥 도어’.

세계 각국의 대통령이나 수상들이 찾아올 때마다 문을 열다보니

TV화면에 가장 많이 얼굴이 나온 영국의 유명인사.

마가렛 대처수상도 국가의 기밀문서가 든 가방을 그에게 맡길 정도

로 그의 신뢰는 높았다.

제아무리 유명한 외국수상도 예고없이 불쑥 나타나면 못들어가게

제지하는 그의 엄격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재직시절 누가 가장 인상에 남느냐고 묻는 기자에게 그는 조지 부시

새통령과 넬슨 만델라 수상을 꼽았다.

공군출신인 부시 대통령은 일개 문지기인 그와 전투기에 관한 토론

을 벌일 정도로 소탈했고 만델라 수상은 영국수상에게 편지할 때마

다 밥 조든의 안부를 꼭 빼놓지 않았기 때문.

“그 문지기 양반 건강하신지?”

시사만화가 이원복교수는 1975년 독일 유학시절 자주 이용하던 우

체 국엘 가면 지금도 똑같은 그 자리에 똑같은 그 사람이 앉아 일하

고 있는 것에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달라진 건 그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는 것 뿐.

세계 곳곳엔 이렇게 고색창연한 것들이 소중하게 보존되고 있다.

다이아몬드가 보석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진짜 다이아몬드가 아닐

까?

미국 뉴욕대학에 가면 그 교정안에 100년 된 카페가 있다고 한다.

자그마한 카페엔 100년의 시간이 쌓여있다.

토머스의 낙서가 보이고 고르바초프의 유며 한 자락, 피카소의 그림

도 어딘가 찾아보면 있을 것이다.

고색창연한 시간의 향기와 커피향기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가슴

에 잊지못할 신화를 심어주는 곳.

뭐든지 때려부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몇년전 갔던 곳을 찾아가면

딴 세상에 온것처럼 완전 성형수술했거나 현재 공사진행중.

못생기면 못생긴대로, 잘생기면 잘생긴대로 시간이 풍화된 향기를

음미할 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100년 된 카페 이야길 듣고, 난 사람도그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

해 본다.

젊고 이쁜 것만 최고가 아니라, 안 젊고 안 이뻐도 자기만의 세월

이 담겨있고 자기만의 향기가 스며있으면 그것이 최고.

그래서 난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그 나이만큼의 숫자로 이렇게 부른

다.

“넌 27년 된 카페.”

“넌 35년된 카페.”

그리고 이렇게 묻기도 한다.

“너의 카페속엔 고혹적인 빛깔의 붉은 포도주와 그윽한 향기의 커

피가 가득하겠지?

아님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과 헨델의 ‘달빛천사’라도 흐르고

있지 않니?

김민기의 ‘아침이슬’이나 안치환의 ‘내가 만일...’을 들려준다면

더욱 좋고.”

현대방송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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