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기억 공유 행사 열려

추모메시지 63% ‘고인명복’

폭력 피해 고백글도 72건

 

추모장소 지킨 시민 ‘총대’

몰카·신상털이에 어려움도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 존’에서 여성이 추모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 ⓒ변지은 기자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 존’에서 여성이 추모 메시지를 붙이고 있다. ⓒ변지은 기자

5월 17일 강남역 인근 남녀 공용화장실에서 20대 여성이 살해당했다. 당시 가해자는 화장실에서 범행 대상을 기다리며 남성 7명을 그대로 보낸 후 처음으로 들어온 여성을 살해했다. 그리고 “여자들이 자기를 무시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여성만을 노려 발생한 사건에 여성들은 일제히 분노했다. 여성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집단적 각성이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수 없이 적힌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추모 메시지는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이하 강남역 사건)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분노가 함축된 여성들의 목소리였다.

전국서 모인 3만5350장의 추모 포스트잇

강남역 사건 발생 후 약 200일이 지났다. 한국 사회의 처참한 여성인권과 뿌리 깊은 여성혐오를 공론화한 이 사건을 기억하고 공유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11월 30일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주최로 열린 ‘성평등을 향한 198일간의 기록과 기억-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을 중심으로’ 공유 행사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날 행사는 강남역 사건이 발생한 5월 17일부터 11월 30일까지 198일의 기록과 기억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서울시는 그동안 ‘강남역 10번 출구’를 포함해 전국 9개 지역에서 시민이 남긴 추모 포스트잇 3만5350장을 각 지역 ‘총대’ 도움을 받아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으로 옮겨와 전수 입력하고 주제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거쳤다. 총대는 ‘총대를 메다’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추모 포스트잇을 지키고 보존한 시민주체들을 말한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 존’에 전시된 추모 메시지. ⓒ변지은 기자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 존’에 전시된 추모 메시지. ⓒ변지은 기자

여성가족재단 직원들은 포스트잇을 사진으로 찍고 추모글과 사진을 일일이 입력했다. 각 지역에서 올라오는 추모 포스트잇은 총대들이 정리해 서울로 보냈지만, 강남역 10번 출구에 남겨진 2만여장의 포스트잇은 떼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최대한 손상이 가지 않도록 떼어낸 후 사진을 찍고 입력하는 일만 두달이 걸렸다. 추모글은 지역별로 서울이 2만1454건, 부산 5471건, 대구 3214건, 대전 1646건, 울산 1199건, 전주 695건, 부천 654건, 광주 583건, 청주 434건 등 총 3만5350장에 달한다.

포스트잇에 담긴 글을 주제별로 살펴보면 ‘고인에 대한 명복’이 63.7%로 가장 많았다. 이어 ‘여성혐오범죄’(19.6%),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12.5%), ‘미안합니다’(11.3%),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7.5%) 등의 메시지가 담겼다.

추모 메시지 중에는 자신이 당한 폭력에 대해 상세히 고백하는 글도 72건이 포함됐다. 한 여성은 “여자 아이들만 모였을 때 누군가 ‘나 사실, 어렸을 때 성추행 당한 적 있다’고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어? 너도’하고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고 적었고, 또 다른 여성은 “13년 전 나는 화장실에서 칼로 협박당해 강도 강간 피해자가 됐지만 죽지 않았다. 단지 당신보다 약간 운이 좋아서”라고 썼다. 여성들은 포스트잇을 통해 자신의 성폭력, 여성혐오 피해 경험을 증언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강요당했던 침묵의 틀을 깨뜨리기 시작했다.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추모자료 3만5350건 기록 결과 ⓒ서울시여성가족재단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추모자료 3만5350건 기록 결과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추모공간 지킨 평범한 시민주체들, ‘총대’

재단은 각 지역 추모공간을 운영하고 관리한 총대와의 인터뷰도 공개해 당시의 현장 상황과 과정, 심경 등을 소개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밤 새워 추모 포스트잇을 지킨 강남역 총대 A씨는 “강남역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추모 장소에 들렀는데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여자들 4명이 지키고 있었다”며 “그 근처에서 남자들이 계속 왔다갔다하며 위협을 하고 싸움도 일어나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날부터 5일간 그곳에서 밤을 세웠다”고 했다. 그는 추모 공간을 지킨 이유에 대해 “세상을 바꿔야겠다고 나간 것은 아니다”라며 “포스트잇이 날아가거나 찢기지 않게 지킨 것”이라고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죽임 당한 친구와 스물셋 동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대전시청역 총대 B씨는 “같은 나이의 친구를 추모하기 위해 기획을 했다”며 “그 친구도 나처럼 취직 같은 평범한 목표가 있었을 텐데 너무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 가슴이 아팠고, 감정이입이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평범한 시민들이 애도 글을 남기는 추모공간은 일부 남성들의 등장으로 전쟁터로 변하기도 했다. 강남역 총대 A씨는 “8명이 밤을 세우는데 많게는 100명이 몰려와 시비를 걸고 불을 지르고 술을 마시고 욕을 했다. 밤에는 전쟁터였다”며 “일명 ‘핑크코끼리 사건’이 있던 날엔 경찰에 70차례 신고를 했을 정도로 위험하고 죽을 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핑크코끼리 사건은 5월 20일 강남역 추모 장소에 핑크색 코끼리 인형 옷을 입은 남성이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것’이라는 문구가 적힌 화이트보드를 들고 등장하면서 벌어졌다. 이 남성은 “의상과 문구가 적절치 않다”는 시민들의 항의를 받고 현장에서 쫓겨 난 후 일부 시민들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었다. 특히 강남역은 극우 성향 커뮤니티 사이트인 일간베스트(일베) 이용자들이 추모 장소에 나타나 봉사자들에게 욕을 하고, 셀카를 찍거나 봉사자 사진을 몰래 찍어 일베에 올리기도 했다. 이들은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들을 잊지 맙시다’라고 쓴 조롱 섞인 화환을 추모 장소에 보내기도 했다.

 

이지원 페미니즘액션그룹 강남역10번출구 활동가(왼쪽부터), 김홍미리 여성주의연구활동가,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오찬호 사회학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3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성평등도서관 여기에서 열린 ‘성평등을 향한 198일 간의 기록과 기억’ 세미나에 참석해 ‘강남역 10번 출구, 그 이후’ 패널토크를 하고 있다. ⓒ변지은 기자
이지원 페미니즘액션그룹 강남역10번출구 활동가(왼쪽부터), 김홍미리 여성주의연구활동가,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오찬호 사회학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30일 오후 서울 동작구 성평등도서관 여기에서 열린 ‘성평등을 향한 198일 간의 기록과 기억’ 세미나에 참석해 ‘강남역 10번 출구, 그 이후’ 패널토크를 하고 있다. ⓒ변지은 기자

전주전북대 총대 C씨도 “하루에 한번씩은 포스트잇 모으는 판을 반토막 내거나, 꽃을 사놨는데 가져가 버리고, 포스트잇을 찢는 일이 발생했다”며 “경찰에 신고도 했지만 결국 잡지 못했다”고 했다.

이날 패널토크에 참석한 강남역 총대는 추모 공간에서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몰카 촬영에 대해서도 강력 비판했다. 그는 “추모 포스트잇을 철거하는 과정에서도 일베 이용자들이 현장에 나와 욕을 하고 겁박하고 사진을 찍어 경찰을 보호를 받으며 철거를 해야했다”며 “추모 장소에서 몰카에 시달려 지금도 공공장소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랄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서울시여성가족재단 2층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강남역 10번 출구를 형상화한 ‘기억 존’을 마련했다. 이곳 벽면엔 전국에서 추모 포스트잇과 함께 ‘기록되지 않는 역사는 기억될 수 없고 기억하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습니다’라는 글귀가 써있다.

이날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기록해야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해야 성찰할 수 있고, 성찰해야 새로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며 “개별적 행동이 아닌 사회 전체, 공동체가 기억하고 성찰하고 변화를 만들어야 강남역 사건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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